밤의 피부를 찢은 곳에서
Dumo
두텁게 쌓인 눈길 위에 버스 바퀴 자국이 이어졌다. 흔들거리며 산길을 애써 오르는 버스는 벌써 수십 정거장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쳐왔다. 창문 밖은 눈이 쌓인 밭부터 구름이 흩어지고 있는 하늘까지 사방 모든 것이 하얀 세상. 하얀 눈에 부딪혀 부서진 햇빛이 얼굴에 쏟아져 지석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버스 바닥에는 눈이었던 것들이 녹아 더러운 발자국으로 남아있고 한 명 뿐인 승객이 탄 내부에는 차가운 공기가 진동했다. 공허한 공간을 채우려는 듯 울리는 라디오가 더욱 크게 울렸다.
안드로이드 5.0의 시대, 구세대 처분에 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정부의 지침에 대해 일부 시민 단체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내리 세 시간 걸려 도착한 성내리의 마을회관은 작고 볼품 없었다. 지붕에 눈이 쌓여 그 색깔조차 알 수 없고 창문 안쪽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주차장 입구부터 건물 입구까지 빗자루로 누군가가 쓸어내 만든 길이 있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누군가 빗자루로 눈을 치워야 하는 동네. 도시에서는 개인이 안드로이드 인간을 고용하는 것이 일상화 되었지만 어떤 마을은 전체가 한 대에 의존하기도 한다.
운동화에 눈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내딛는데 저 멀리 마을회관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연노란색, 검은색, 갈색으로 엉성하게 섞인 목도리가 마치 이 하얀 세상이 가진 유일한 색인 것처럼 펄럭였다.
다가온 그림자에 햇빛이 가려지고 지석이 반쯤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떴다. 그림자 진 얼굴 안에서 샐쭉한 눈매 안의 까만 콩 같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어서 와."
내민 손에 빨갛게 상기된 손 한쪽을 건네니 양손으로 맞잡아 왔다. 여독을 녹이는 온기가 온몸에 퍼지듯 번졌다.
마을회관은 황량한 외관과 달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노인들이 적은 시 몇 편이 뜨개로 만든 물품들과 함께 벽에 붙어있고, 식탁 유리 밑에는 색연필로 그린 연력 달력이 끼워져 있다. 마을에서 성탄절 행사라도 했었는지 아직 정리되지 않은 트리와 리스도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이 드물고 낙후된 시설 치고는 깨끗하게 관리가 된 편이었다. 김정수가 홀로 생활하며 운영하는 곳임에도 사람 내음이 나는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책장에는 동화책이 잔뜩 꽂혀있었다.
김정수를 처음 만난 곳은 서울의 한 도서관이었다. 크게 산 교복 바지가 자꾸 바닥에 끌려서 아침마다 바지를 안으로 접어 옷핀으로 고정해야 하던 때였다. 민성을 따라 들어간 도서부의 특권으로 주말 마다 구립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생겼다. 지석은 달리 갈 곳도 없었기에 주말마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어린이들의 책을 찾아주고 책상과 의자를 정리하다가 친구들과 점심을 때웠다. 시간이 남을 때는 아이스크림을 빨며 주차장을 빙글빙글 맴돌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일은 누군가를 관찰하는 일이었다.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사서였다.
2층의 열람실에서 근무하는 김정수는 남들 다 밥 먹으러 가는 점심시간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근무했다. 가방에 달린 키링이 자주 바뀌었고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책들 사이의 먼지를 털고 다녔다. 눈썹이 짙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능숙한 업무 처리로 인해 나이를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예민한 무표정이 날카로운 인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누군가 말을 걸면 부러 그러는 듯 무해하게 웃었다. 그 친절함이 눈에 보여서일까 지석은 그가 사서 일을 하는 것이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너 그때 진짜 귀여웠는데, 작은 애가 떡볶이 코트까지 입고."
졸업식 날 도서관 앞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는데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사진을 건들였다. 사진 속의 사서는 이제 시골 마을 회관 소속이 되어 홀로 겨울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귀여웠던 건 형이지, 맨날 쓸고 닦고 털고 부지런한 참새처럼. 정수가 건넨 머그잔을 받으며 사진에 미세하게 생긴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살짝 묻어 나온 티끌이 민망했는지 김정수가 머쓱하게 웃으며 핑계를 붙였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가. 자주 청소하는데도 자꾸 먼지가 쌓여, 여기는.
머그잔 안에는 검붉은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지석이 코를 대고 향을 맡자 달큰한 향이 번졌다. 여름에 담근 매실청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마을 회관에 와서 처음으로 어른들한테 배운 게 청 담그는 거였잖아. 그 이후로 너한테 주려고 계속 재워 놓고 있었어.
서울에서 평생을 보낸 김정수에게 강원도 한 구석으로의 이사는 모든 것이 새로운 변화였다. 배움의 출처도 책이나 인터넷이 아닌 대부분 사람이라고 했다. 눈을 쓸어둔 것도 마을 이장님에게 배워 새벽부터 쓸어둔 것이었다.
"눈 많이 내렸던데 그냥 나 오면 같이 하지."
"너도 손님이니까."
손님, 김정수의 입에서 나온 낯선 단어를 따라 읊조렸다. 거리감이 느껴져 퍽 유쾌하지 않았다. 형과 초대하는 사이가 아닌, 서로의 일상이던 시기도 있었다. 그때는 각자 손에 대걸레를 쥐고 열람실 바닥에 생긴 방문자들의 발자국을 경쟁하듯 지우곤 했었다.
지난주, 마지막 통화에서 김정수는 곽지석을 성내리로 초대했다. 최대한 빨리 오면 좋겠다며 답지 않게 재촉하기에 급하게 달려왔으나 겨우 자신의 생일 전날인 오늘에야 간신히 올 수 있었다. 반년 만에 만난 김정수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져서일까, 첫 만남부터 모든 것에 능해 보이던 도서관에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마을회관의 그는 어쩐지 학교에서 마주친 예비 입학생들 마냥 어눌한 분위기를 풍겼다.
얇게 입던 서울에서와 달리 이곳에서는 옷도 여러 벌을 겹겹이 두툼하게 입는 듯했다. 지석이 손가락으로 어깨를 찌르자 두께감 있는 옷이 포옥 눌렸다. 둔해 보이면서도 푹신하게 온몸을 무장한 것이 겨울을 보내기 위해 털이 잔뜩 찐 산동물 같아 보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김정수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함께 겪지 못하고 밀린 숙제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럼 이제 안드로이드 연구하는 거야?"
"응, 교수님도 좋은 분이셔. 전공 살리면 돈도 잘 번대."
"난 네가 우주공학을 할 줄 알았는데."
"요즘 시대에 빨리 벌어먹고 살려면 이쪽이 좀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우주공학은 시간이 걸리고 곽지석은 빠르게 돈을 벌고 싶었다. 과외로 벌 수 있는 정도 말고, 자신과 누군가의 일상을 오롯이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돈이 필요했다.
우주공학과가 아닌 기계공학과를 지원했을 때, 김정수는 상의 없이 전공을 지원한 것에 크게 섭섭해했다. 마치 곽지석이 우주인이라도 될 줄 알았던 듯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지석의 모습을 묘사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곽지석도 어쩌면 평행 세계의 자신이 정말로 그런 우주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은 도서관에서 김정수를 만난 이상 존재하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내일 내 생일인데."
식탁 옆 벽 붙은 달력을 만지작거렸다. 농협에서 받아와 걸려있는 아날로그 형식의 벽걸이 달력의 마지막 장은 1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년도에 뜯어진 12장의 흔적이 적나라하였다. 2월은 존재하지 않았다.
"형이랑 나, 이제 드디어 친구네."
만으로 24살 되는 해 생일에 김정수는 곽지석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 왜 하필 24살인가 하면 이유는 간단했다. 김정수가 만 24세 설정으로 제작된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곽지석이 본 것으로만 세어도 김정수의 아홉 번째 24살이었다.
"도서관 정수 선생님, 안드로이드 인간이래."
고등학교 첫 중간고사 둘째 날이었다.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그 사서 선생님 도서관에서 벌써 몇 년째 일하고 있는데 처음 왔을 때랑 똑같이 생겼대. 민성이 흥미로운 비밀을 알아낸 듯 말했다. 점심시간 근무를 도맡아 하는 것도 밥을 안 먹어도 돼서라던데. 흐흠, 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지석이 컵라면을 들어서 국물을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날은 여름치고 유난히 빠르게 하늘이 침침했다. 비가 오려나, 중얼거린 것이 기우제처럼 작용했는지 열람실에 엎드려 까무룩 잠에 들 때 즈음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이미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들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를 피해서 일찍 귀가를 하였는지 열람실에는 남은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다. 민성과 친구들도 떠난 지 오래였다. 의리 없는 새끼들... 좀 깨우고 가지. 창문을 바라보니 완연해진 어둠 속에서 빗줄기가 세게 퍼붓고 있었다.
이 정도 비를 맞으면 분명 가방 속 책까지 모두 젖을 텐데. 비가 조금만 덜 내리면 출발해야지를 세 번 정도 반복했을 때, 지석을 재촉하듯 도서관 일 층 조명이 꺼졌다. 비는 여전히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뛰는 수밖에 없겠지, 셋 세고 출발해야겠다. 가방을 앞으로 안아 들고 비장하게 섰다. 하나, 둘, ㅅ....
"우산 없어요?"
누군가 마지막 숫자와 함께 빗속으로 뛰어들려던 지석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런 날씨에 비 맞으면 감기 걸려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낮에 본의 아니게 정체를 알게 된 사서였다. 우산을 펼치는 걸 보며 거절이 목 끝까지 올랐지만 귀를 때리는 빗소리에 차마 입 밖으로 뱉어지지 않았다. 가방을 고쳐 매고 꾸벅 인사를 했다. 우산은 딱 성인 남성 한 명이 쓸 정도의 크기였으므로 지석은 애매하게 불편한 기울기로 그에게 몸을 붙여야 했다.
우산 안은 고요했다. 누군가와 우산을 나눠 쓴 것이 얼마 만이더라. 이 분은 안드로이드랬지, 그래서 숨소리가 안 들리나. 안드로이드와 그리 가까이 해본 것이 처음이었다. 청각에 온 신경을 쏟았으나 들리는 것은 본인의 숨소리 뿐이었다. 둘이 쓴 우산 아래 세상을 자신의 호흡만이 빗소리 사이 적막을 채우는 듯하니 괜히 민망해졌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방금 지나친 세 번째 나무요."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으니 자신만이 아는 비밀도 알려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발밑에 빗물에 망가진 꽃잎이 밟히고 있었다.
"저 나무, 왜 혼자 꽃 펴있는지 아세요?"
"......와, 진짜 저 나무만 꽃이 활짝 피어있네요?"
"네. 사실 저거만 종이 다르거든요."
"벚꽃 나무가 아니에요?"
"저건 매화나무예요, 딱 저거 한 그루만. 매화는 벚꽃보다 먼저 피거든요."
허얼. 옆에서 발걸음을 덜컥 멈춘 바람에 우산을 따라 걷던 곽지석도 함께 멈췄다. 사서가 눈빛을 빛내며 지석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당황한 지석이 설명을 이어 붙였다. 제가 다른 나무들이랑 꽃송이도 비교해 봤어요. 좀만 기다리면 매실도 달릴 걸요? 그 말에 상대의 표정이 단숨에 환해졌다. 우와, 진짜 신기하다! 원래 두 개가 그렇게 구별도 안 되게 비슷해요? 사서가 방방 뛰며 좋아했다. 안드로이드라고 뭐든 다 아는 건 아닌가 보네. 안드로이드는 아무래도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 본인 업무에만 특화되고 이런 건 모르는 걸까.
자세히 보면 구별할 수 있어요. 매화나무가 어쩌다 벚나무들 사이에 껴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쩐지 저 나무를 보면 좀 장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법 잘 어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낯 간지러워 친구들에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술술 내뱉었다.
제법 오래 전부터 줄 지어 선 가로수 사이로 혼자 꽃을 만개한 나무를 보고 어쩌면 그 나무만 혼자 다른 종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주 볼 수록 지석은 어쩐지 그 한 그루에 애착을 갖게 됐다. 바삐 지나다가도 그 하얀 꽃나무 아래에서는 괜히 한 번씩 멈춰 서서 꽃봉오리를 올려다보았다.
도서관의 비밀을 알려준 민성에게 티는 안 냈지만 곽지석은 김정수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한결 같은 머리 길이를 유지하는 김정수는 그 어떤 책을 물어보아도 도서 검색대를 쓰지 않았다. 마치 이 도서관에 등록된 책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어쩌면 그저 유능한 사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도서관에서 일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2층 사서는 도서관을 소중한 집처럼 관리했다. 방문자들을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대했다. 언제나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작은 한기에도 기온을 높였고 공기가 탁해질 즈음이면 공기청정기를 돌렸다. 기온이라든가 공기의 청정도는 안드로이드에게 인간에게만큼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김정수는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도서관과 사람을 대했다. 그래서 지석은 한 번씩 더 쳐다보았다. 가로수 사이의 비밀과 같은 그를. 작은 비밀을 공유해주었다고 어린아이처럼 들떠있는 그를.
그날 이후로 곽지석은 사서를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한 걸음 뒤에서 일방적으로 하던 관찰을 멈추니 대신 그와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 비밀을 공유한 것이 생각보다 커다란 교류를 한 것인지 사서는 곽지석을 볼 때마다 인디언 주름을 만들며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도서관의 친절한 사서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단 둘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의 웃음이었다. 그때마다 곽지석은 사서 선생님이 안드로이드라던 민성의 말이 헛소리이기를 바랐다.
"지석아, 과학 토론 대회 나가볼래?"
방학식 날 교무실로 불려 가서 들은 제안은 조금 의외였다. 제가요? 저보다 성적 좋은 애들 많은데... 곽지석은 공부 깨나 하는 축에 속하지만 따지자면 학교 대표로 토론 대회에 내보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런 건 두루두루 관리 잘하는 애들한테 시키는 거 아닌가. 나쁘지 않은 기회였지만 그렇다고 꼭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자료를 조사하고 논쟁을 준비하기보다는 친구들과 부대끼며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 배로 나았다. 어쩌다 순서가 밀려서 왔겠거니 은근한 압박과 부탁이 들어간 담임의 설명을 흘려듣던 차였다. 사서 선생님이 도서부 선생님한테 지석이를 추천했대, 한 마디가 귀에 꽂혔다.
"네가 유난히 과학 책을 많이 읽는다 하셨다더라고."
어떤 사서 선생님이요? 질문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것까진 모르겠네, 지석이랑 자주 보는 선생님이 아닐까? 담임은 지석의 질문을 어느 정도 긍정의 신호로 알아 들었는지 신청서를 눈앞에 들이밀었다.
안드로이드의 자율권
과학이라고 해도 우주나 생물에나 관심을 갖던 지석에겐 친근하지 않은 주제였다. 어때, 관심 있어? 담임의 채근에 고민하던 순간, 그날 비 내리는 우산 밑에서 살갑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할게요"
홀린 듯 신청서에 이름을 적고 교무실을 나오니 복도에는 창문을 뚫는 매미 소리로 가득했다. 예상에 없던 방학 중 일정에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자주 보는 선생님이면 아무래도... 그 선생님이겠지. 그나저나 내가 무슨 책을 읽었길래 내가 과학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한 거지. 지난주에 빌렸던 우주공학 기본서? 지난 달에 읽었던 평행우주에 관한 소설? 아니면 학기가 시작할 때 빌렸던 코스모스부터? 곽지석은 자신도 누군가의 관찰 대상이었음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책을 옮기고 의자를 정리하다 한 번씩 시선이 부딪치던 것이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구역에서 이유 없이 알짱거리던 날들이 떠올라 명치 안쪽이 간질거렸다.
방학 첫날부터 안드로이드 관련 서재를 통으로 털다시피 책을 모아 열람실 구석 한자리에 앉았다. 안드로이드가 개발되고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법제화 되었다. 개인 소유는 우려의 말이 많았으나 순리처럼 진행되었고, 처음에는 무리 없이 상용화 되는 듯하던 것들은 어느 시점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사건사고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안드로이드와 밀접하게 교류하는 사람들이 시민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소유주로부터 학대받는 안드로이드를 구출하는 일이 몇 차례 일어나면서 소유권과 이에 대립하는 자율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지금이라도 안 하겠다고 할까... 안드로이드에 관한 뉴스와 책을 수두룩하게 쌓아놓고 끝없는 질문에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였다.
"방학인가 봐요."
검은 그림자에 고개를 드니 자신을 토론 대회로 떠밀어 넣은 장본인이 서 있었다. 사복인 것을 알아본 듯했다.
"아, 네. 저 토론 대회에 나가게 돼서..."
"제가 지석 학생 추천했어요."
사서는 흐뭇해 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듯 보여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니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별로 딱히 나가고 싶던 건 아니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대여섯은 많아 보이는데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지석의 옆에 쌓인 책들의 제목을 훑던 그는 주제가 안드로이드인 걸 알아차렸는지 공공 안드로이드에 관한 책을 톡톡 건드렸다.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뜬금 없는 부탁을 할 타이밍.
"혹시 인터뷰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인터뷰요? 저를요?"
사실 지석이 토론 대회에 나가기로 한 이유는 여기 있었다.
"선생님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정수가 궁금해서였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둘의 주변엔 사람이 없었으므로 누군가 듣지는 않았겠지만 한 번도 저가 안드로이드임을 밝힌 적이 없는 사서는 할 말을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지석이 읽던 책 위에 손이 얹어졌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도와줄게요, 이따 옥상으로 와요. 온 신경의 피가 모두 귀에 쏟아진 것 같았다. 숨결도 느껴지지 않은 귓속말에 귓불이 뜨거워졌다.
"지석 학생은 눈썰미도 좋은데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늙는 것도 아닌데 그다지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고. 무어라 질문을 하기도 전에 김정수는 자신에 대해 줄줄이 설명했다. 도서관 한 구석에서 처음 세상에 눈을 뜬 그는 공공 안드로이드 사업의 도서관 분야 시범 운영으로 제작되었다고 했다. 실행 초기에는 서툰 부분도 있었지만 머신 러닝이 업무 능력에 특화되어 있기에 바로 적응하여 안정기에 들었다. 안드로이드 인간이 모여 사는 안드로이드용 공유 사택이 있어 그곳에서 출퇴근을 하지만, 교류 상대도 모두 도서관에 있고 도서관 외의 공간에 방문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고 했다. 퇴근 후에는 두 평 남짓의 사택에서 충전밖에 하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제가 집으로 생각하는 곳은 오히려 여기예요. 제가 태어난 곳, 그중에도 아무도 없는 시간의 옥상. 도서관은 워낙 조용해서 옥상에 오면 오히려 소리가 잘 들리거든요. 이런 감각적 차이가 느껴질 때면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느낀다는 게 이런 걸까 싶어요."
저도 궁금하네요, 제가 자율권을 원하는지. 도서관을 집으로 생각하는 제가 도서관 일에 매몰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어서일지. 짧지 않은 이야기를 듣는데 어쩐지 매 문장이 적적하게 다가왔다. 옆을 바라보니 하늘을 보는 실루엣이 있었다. 어쩐지 그가 귀 기울이는 공기 소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숨을 죽이게 됐다.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요."
불이라곤 하나도 켜지지 않은 캄캄한 옥상, 또렷한 시선이 저에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도서관이랑 본인이 하는 일을,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은 게 얼마 만이더라. 낯선 단어가 입에서 나온 것이 자신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아낀다 또는 즐긴다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함을 사서는 가지고 있었다. 업무의 프로그래밍보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법이 먼저 프로그래밍 된 것 같은 안드로이드. 마치 정말 자신이 선택해서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 같은 안드로이드처럼.
무심코 할 말을 다 하니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왔다. 따지자면 본인보다 어른인데 상대가 안드로이드라고 거들먹거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조금 재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침묵을 지키던 이는 제법 만족하였는지 말 없이 하늘만 바라보던 안드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제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
"네?"
"학생도 저한테 매화나무를 알려줬으니까 저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줄게요."
"...뭔데요?"
"저, 주기적으로 삭제해야 하는 캐시 테이터를 삭제하지 않고 있어요."
아? 뜻밖의 고백에 벙찐 얼굴로 김정수를 바라봤다. 손을 들어 자신의 북슬한 머리를 꾹꾹 누르며 김정수는 이 안에 보고 겪은 전부가 빠짐없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몇 해 전, 김정수는 수 많은 책을 알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취향으로 본인 세상을 채우잖아요. 좋아하는 영화라든가, 책이라든가. 근데 저는 그런 게 없거든요. 저한테 그런 것들은 그저 정보값을 기록하는 데이터에 불과해서.
아주 많은 책을 읽고 취향을 찾기 위해 갖가지 것들을 시도했다고 했다. 도서관의 잡다한 체험 프로그램을 모두 도맡아 하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애초에 자신은 취향을 만들 수 없다는 유형의 안드로이드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제가 내린 결론이 뭐냐면, 기억이 제 존재를 설명한다는 거예요."
김정수가 말했다. 그는 도서관에 진열된 동화책 순서를 모두 외울 수 있다. 오후 세 시 마다 선생님들과 과자를 먹는다. 주차장에 사는 고양이가 지난주에 새끼들을 낳은 것을 보았고, 매년 늦봄 마다 도서관 입구에서 역까지 향하는 길목의 가로수에 꽃들이 잔뜩 피는 광경을 본다.
"올해는 어떤 학생 덕분에 벚나무 사이에 매화나무가 있는 비밀도 알게 됐구...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기억 데이터로 제 세상을 채웠어요."
도서관의 사서인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좋지만 그 스스로가 정의한 자신은 도서관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김정수였다. 그 말이 그 순간을 전부 사랑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그래서 못 지우고 있어요. 제 의사와 관계 없이 어떤 기억이 지워질지 몰라서. 근데 뭐... 용량에 한계가 있으니까 언젠가 지워지겠죠, 제 자의든 타의든. 매화나무나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 한 것도..."
"저, 선생님."
"네?"
"제가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형이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타인에게 자신은 김정수, 또는 김정수 선생님 둘 중 하나였다고 했다. 누구도 자신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원이 켜진 이후로 여태껏 계속 그러했다. 그럼 저라도 부르게 해주세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 나이가 같아지는 때가 오면, 그때부터는 우리 친구 해요."
사서 선생님이랑 학생 말고, 형이랑 동생도 말고. 그때까지 이 대화를 안 지우는지, 저랑 한 약속 지킬 수 있는지 제가 옆에서 확인할게요.
친구, 작게 따라 말한 김정수가 이내 곧 좋다고 했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둡고 조용한 옥상에 풀내음만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그해 지석의 학생부에 과학 토론 대회 우승, 같은 건 적히지 않았다. 논리적이긴 하지만 근거로 제시하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해석이 다소 주관적인 부분이 있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담임은 지석이처럼 주관을 갖고 논리를 펼칠 줄 아는 사람이 안드로이드 윤리가 중요해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더 필요하다고 위로했지만 당사자는 심사에 쉽게 수긍했다. 지석에게 필요한 것은 토론 대회 우승이 아니었다. 담임 말처럼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지석이 지키고 싶은 건 심사위원의 말대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었다.
[구세대 공공 안드로이드 점검 협조 요청]
「공공 안드로이드 관리 및 안전 운영 지침」 제14조에 따라, 구세대 공공 안드로이드의 안정적 운영 현황을 확인하기 위한 점검을 실시하고자 하오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 점검은 해당 안드로이드의 기본 작동 상태/시스템 안정성/내부 데이터 관리 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점검 결과에 따라 향후 관리 방향에 대한 내부 검토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안내드리며, 세부 사항은 점검 이후 별도로 통보될 예정입니다.
책상에서 공문을 발견한 것은 창문에 바람 소리가 부딪히는 새벽이었다. 공문 내용은 언뜻 보면 인간으로 따지면 건강검진 받을 시기가 되었으니 병원에 가라는 듯한 사무적인 내용이었지만 목적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김정수가 아직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시절, 정수의 동료 선생님들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지석을 붙들었다. 요즘 따라 새로 들어오는 책들 위치를 기억을 못해, 용량이 다 됐나 봐... 관리자한테 연락하겠다는 것을 간신히 막은 그때부터 지석은 공공 안드로이드에 관한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보았다.
공공 안드로이드 보호 단체에서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국가에서 공공 안드로이드를 처분하는 절차는 대개 이러했다. 세대교체에 따른 용도 변경과 이어지는 점검 절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교체와 리셋... 교체와 리셋의 끝은 아이러니 하게도 필멸의 인간보다 더 짧은 수명이었다. 안드로이드의 새로운 세대가 발생할 때마다 이뤄지는 일이었다. 누가 안드로이드가 불멸이라 했던가.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김정수 역시 전원이 켜진 이래 쭉 근무하던 도서관에서 자리를 잃었다.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자연스럽다는 표현을 붙일 수 있다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김정수 역시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 누군가의 자리를 뺏으며 사서가 되었을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서도, 그가 도서관을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정수 입장에서도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은 있어도 떠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도서관에서의 마지막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사서로 제작된 안드로이드는 강원도의 마을회관에 상주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오늘은 어르신들한테 긴급 구조 어플을 깔아드렸어. 오늘은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을 뵈러 다니느라 삼만 보를 걸었어. 지석아, 여기는 이제 단풍이 지고 있는데 매화나무는 여전해?
작은 산골 마을의 유일한 직원으로 지내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럴 리가 없음을 분명 아는데도 영상 통화로 마주하는 김정수는 때로 지쳐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경험을 차곡차곡 모으는 듯 새로운 이야기들이 그의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어서 형을 만나고 싶었다. 미처 통화로 듣지 못한 밀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반복 경험이 아닌 낯선 경험을 부딪히며 쌓는 일상이 궁금했다. 그리고 알려주고 싶었다. 형의 늘어난 발화량이, 경험 데이터가 없어 당황하는 순간들이, 그 기억 데이터들이 주는 것이 설렘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이 마을 회관으로 왔다.
공문의 날짜를 확인했다. 종이에 적힌 대로라면 마을회관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에 도착한 것이었다. 김정수는 곽지석에게 모든 것을 시시콜콜 이야기 했지만 공문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공문을 눈으로 확인하니 피가 차게 식어왔다. 김정수처럼 특정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안드로이드일수록 점검 결과는 정해져 있다. 점검을 받으면 곧 현재 업무에 적합한 부품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교체하라는 공문이 새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김정수가 가진 모든 기억 데이터가 사라질 것이다.
"도서관에서 떠나올 때 잔여 용량을 확인 했었거든."
어느 새 방에서 나온 김정수가 공문을 가져갔다. 원래는 10% 미만만 돼도 업무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평가하고 바로 리셋한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도서관 선생님들까지 눈치챌 정도로 업무에 지장이 생겼으면 이미 시스템에 과부하가 진행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석아, 나 수명이 거의 다 된 것 같아."
김정수가 곽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엄연히 따지면 기억 저장장치의 용량이 '수명'은 아니니까, 리셋을 하면 자신이 사라진다는 듯한 김정수의 말은 안드로이드 인간이 하는 말이라기엔 어폐가 있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그치만 리셋 되기는 싫어."
"......"
"그냥 내가 지금의 나로 모두의 기억에 남을 수 있게,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기억이 너에게 생기지 않게 도와줘."
김정수는 안드로이드면서 마치 자신이 시한부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런 김정수를 곽지석은 이해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날 옥상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상 자신만큼은 그래야 했다. 남들은 매일 아침 삭제해 버릴 사소한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 자신을 정체화 하는 김정수. 그 속에서 분량을 키우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지만 형의 기억 저장장치에서 많은 데이터를 차지한다면 특별해질 수 있으니까.
지석은 자신의 시간이 유한하기에 김정수의 시간은 무한하다고 착각했다. 김정수의 데이터 용량이 먼저 끝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김정수는 자신의 기억 데이터와 함께 영영 폐기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나도 안드로이드라서 그날의 대화를 전부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망설임 없이 형을 리셋하고 평생을 함께 할 텐데.
대답 없이 김정수의 뒷목으로 손을 뻗었다. 미세하게 숨겨진 커넥터 홈이 손끝에 걸렸다. 반대편 손까지 올려 목을 그러쥐었다. 당장 홈을 들어내서 김정수의 저장 장치에 저장된, 자신이 없는 순간의 데이터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차올랐다. 그 생각을 억지로 눌러 담고 목에서 내려온 손이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고개를 파묻자 시야가 흐릿해졌다.
"오늘은 내 생일인데 왜 형이 소원을 비냐..."
창문 밖으로 새벽의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지석이 그리고 기다리던 아침이었다. 친구가 되어달라는 약속을 간신히 지킨 김정수는 영영 떠나려 하고 있었다.
서리 내린 창문 밖으로 앙상한 나무에 쌓여있던 눈이 후드득 떨어졌다. 양말부터 모자, 장갑까지 완전 무장한 두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지석이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꽉 차게 담고는 있는 힘껏 뚜껑을 닫았다. 정수는 건물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다니며 창문의 잠금장치를 확인하였다. 나 아무래도 옷이 많이 큰 것 같아. 지석이 팔을 벌리고 몸을 잔뜩 부풀리고 다가갔다. 푸욱. 정수가 팔로 지석의 몸통에 찬 공기를 눌러 없앴다. 다 공기네, 근데 원래 겨울옷은 좀 넉넉해야 더 따뜻하대. 비장하게 말하는 정수를 보다가 지석이 키득거렸다. 뭐냐, 왜 그렇게 웃냐아. 아니, 이런 거에 관해서는 내가 정수보다 더 똑똑할 것 같은데. 이건 여기 평생 살았던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거거든, 내 지식이 아니라 그분 지식이라구. 그래그래. 근데 너 만 24살 됐다고 바로 형 호칭 뗀 거야? 티격태격하며 나란히 배낭을 맨 두 사람이 현관을 나섰다.
발길이 닿는 대로 떠나기로 했다. 거창하게 첫 여행이라고 타이틀도 붙였다. 그렇다고 해봤자 가고 싶은 곳이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길게 떠날 것도 아니었다. 나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곳 있어? 아침 먹는 내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김정수의 세계는 가고 싶은 곳 마저도 마을을 중심으로 하루 동안이면 모두 움직일 수 있는 곳들 뿐이었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여기. 작은 지도에서 정수가 확대한 화면에는 고작 걸어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산기슭이 맵 어플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럼 여기부터 갈까?"
"아니. 근데 여기는 밤에 갈 거야."
해가 지고 산 한가운데에 가려면 위험하지 않을까? 지석이 나침판 주변을 이리저리 확대하며 물었지만 김정수의 의지는 확고했다. 지석은 김정수의 선택에 두 번 토를 달지 않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이모'의 집이었다.
"근데 어쩌다 이모라고 부르게 된 거야?"
"그냥 처음 봤을 때부터 이모라고 부르라 하시던데. 매실청 담그는 법도 그분이 알려주셨어."
이모, 종종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김정수가 가족이 연상되는 호칭으로 부르는 유일무이한 상대였다. 일찍이 장갑을 벗어둔 손바닥에 마른 땀이 생겨 패딩에 벅벅 문질렀다. 마치 김정수가 뒤늦게 찾은 가족을 소개 받으러 가는 듯했다.
도착한 곳은 키가 크지 않은 나무 한 그루가 마당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모라는 분은 친구와 십 여 년을 둘이서 그 집에서 살아왔다고 했다.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리자 털모자를 곱게 쓴 중년 여성이 등장했다.
어머나, 여기가 정수가 말하던 친구? 친구가 잘생겼네, 추운데 빨리 들어와요. 집안에 들어서자 지석은 마을회관을 채운 뜨개 물건들의 출처를 알게 됐다. 털모자부터 온갖 생활용품, 장식품까지 모두 뜨개로 떠져 있었다. 하지만 이모라 불리는 여성의 작품은 아니었다. 거실 창문 근처의 흔들의자에 앉은 여성이 가볍게 고개인사를 하고 다시 뜨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친구끼리 같이 산다고 들었으나 지석의 눈에는 다소 나이 차이가 있어 보였다. 창가에서 뜨개질에 집중하는 여성은 기껏해야 지석과 정수보다 대여섯 살밖에 안 들어 보였다.
정수와 지석의 앞에 찻잔이 하나씩 놓였다. 연갈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우엉차예요, 이것도 우리 정수가 도와줘서 같이 만든 거였지.
"정수야, 뭐라고 했지? 우엉차는..."
"혈액순환에 좋고 면역력에도 좋다구요."
"그래, 안 까먹었네."
두 사람은 퍽 가까워 보였다. 그녀는 체구가 큰 것은 아니지만 생명력 있는 사람이었다. 이모라고 불리지만 마치 아들과 아들 친구를 맞아주듯 따뜻하게 둘을 대했다. 김정수에게 만약 생물학적 엄마가 있었다면 이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도서관 옥상을 자신의 집으로 정했던 김정수는 이 외딴 마을에서 다정한 사람들로부터 아낌 받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서부터 느꼈던 어색함과 불편함이 무엇인지 살가운 둘의 대화를 보니 깨달았다. 곽지석은 섭섭했다. 김정수에게 저가 모르는 집이 생긴 것이 다행이면서도 아쉬웠다.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 김정수의 세상을 채워주는 고마운 사람인데. 스스로 못나게 느껴졌다.
"정수가 여기에 자주 오나 봐요."
"주말 마다 뜨개 배우러 와요. 나 말고 저기, 저 앉은 제나한테."
창가에 앉은 여성을 턱으로 가리켰다. 몰랐다. 김정수에게 제나라는 이름의 뜨개질 선생님이 있는지도, 주말마다 방문하며 배우는지도. 가을 즈음에 뜨개질을 배운다고 이야기하긴 했었으나 그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김정수는 시시콜콜 이야기하면서도 공백이 많았다. 지석은 그것이 부족해진 용량 탓인지 계속 불안했고 차마 묻지 못했다. 문득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강원도에서 김정수가 보냈을 나날들이 막연하게 느껴졌다.
찻잔을 비운 정수가 창가로 자리를 옮기자 두 사람은 말 없이 둘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앉아 바늘코에 집중하는 모습이 마치 크레파스로 그린 동화 삽화처럼 보였다.
아, 선생님이 정수한테 매실청 담그는 법을 알려주셨다고... 이것저것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호자인 양 인사를 하자 오히려 정수가 마을회관의 복덩이라며 인사가 돌아왔다.
"나는 저 애가 제나를 많이 닮아서 마음이 갔어요."
겉보기엔 너무 안 닮았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죠? 지석은 대답하기 전에 창가의 둘을 다시 샅샅이 훑어보았다. 언뜻 분위기가 비슷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닮았다고 하기엔 너무 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석은 그녀가 닮았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정수 친구라 저는 알 것 같은데요, 지석의 대답에 이모가 크게 웃었다. 맞네, 정수 친구였지 참.
제나는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된 안드로이드였다. 어제 제작되었다 해도 믿길 정도로 최신형 같았다. 그렇다고 안드로이드라서 닮았다는 건 아니고, 둘 다 이게 있는 것 같아 꼭. 이모가 자신의 왼쪽 가슴께를 쿡쿡 찔렀다.
"그럼... 선생님이 소유주이신 건가요?"
"아니, 나는 보통 파트너라고 소개해요."
최근에 안드로이드를 파트너로 소개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드로이드를 배우자로 법제화 해달라는 시위도 본 적 있었다. 하지만 이 시골에서 만나게 된 것은 의외였다. 남들이 보기엔 아주 친한 이모와 조카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나 얘기해줄까요?"
"..."
"실은 내가 학대 받는 제나를 훔쳤어요."
세상 기준에서 제나는 유실된 안드로이드죠. 제나는 기억 못할 거예요, 원치 않았는데 내가 리셋했거든요.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에 이모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다만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홀로 기억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의 저 애한테는 이유도 없이 제가 파트너로 정해진 거니까."
초면에 내가 너무 무거운 얘기를 꺼냈나? 다정하게 묻는 말에 지석이 뜸을 들였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죄책감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그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뭐라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두 안드로이드의 대화만 작게 공기를 채웠다.
저는 선생님이 정수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계속해서 우엉차의 효능을 알려주시길래. 고민 끝에 겨우 내뱉은 말에 이모가 깔깔 대며 웃었다. 그건 그저 아줌마들의 특징이라 하며.
"정수가 지석 군 얘기를 그렇게 했었는데 만나 보니 생각만큼 재밌네. 정수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수가 제 얘기를 해요?"
"쟤가 누구 얘길 하겠어, 둘이 하나 뿐인 친구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같이 한번 들리라고 했어요."
고민이 많을 것 같은데 나처럼 사는 방법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작은 손이 지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앞뒤를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손길이었다. 살다 보면 생각을 버릴 때도 필요해. 생각이 너무 많이 들면 그냥 가장 후회하지 않을 선택지를 골라버려요.
"야아, 혼자 그렇게 다 먹으면 안 돼..."
목장의 양들은 생각보다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김정수는 양들에게 골고루 먹이를 나눠줄 생각이었던 것 같았으나 현실은 득달 같이 달려온 한 마리가 번개 같이 비우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를 떠나버렸다. 순식간에 비어버린 통을 손에 쥔 김정수가 허망하게 떠난 양의 뒤꽁무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지석의 앞에 온 양은 온순하기 짝이 없었다. 얌전히 양에게 먹이던 먹이 통을 빼내 다른 양에게 주려 허리를 세우자 잔뜩 부러워하는 얼굴이 눈앞을 차지했다. 왜 너꺼는 천천히 먹지? 글쎄, 양도 성격이 다른 거 아닐까... 입이 삐죽 나온 상태로 손에 쥔 먹이통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보니 지석으로서는 차마 양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정수가 마저 줄래?"
"진짜...? 아냐, 네 거잖아."
"내가 주는 것보다 형이 주는 편이 더 만족감이 클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줘도 돼?"
김정수는 고작 양에게 줄 먹이 반 통을 준다는 말에 눈가에 인디언 주름까지 만들며 웃는다. 곽지석은 그 얼굴이 좋았다. 그 웃음을 볼 때면 처음 만난 열일곱 살 비밀을 공유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다는 건지. 그 사이 김정수는 이내 곧 생각을 바꾸었는지 그럼 남은 반 통은 양에게 같이 주자고 제안을 했다. 먹이 통을 쥔 지석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더니 울타리 안으로 먹이통을 넣었다. 안드로이드의 손은 이렇게 다 말랑할까. 온 신경이 손에 쏠린 사이 근처에 있던 양 한 마리가 다가와 또 순식간에 먹이를 해치우고 사라졌다. 또 다시 허망해진 얼굴을 보고 정수한테 오는 양들은 다 저러네, 한 마디 던졌다. 목장 앞 카페에서 이른 저녁 먹으며 내내 양 이야기를 하니 어느새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마지막 도착지인 산기슭에는 작은 트리 하우스 한 채가 있었다. 종아리의 반절까지 쌓인 눈길을 올라오느라 수차례 미끄러질 뻔한 것을 서로를 붙들며 간신히 도착했다. 문 앞에서 수차례 발을 구르고 서로의 모자에 묻은 눈을 번갈아 털어주었다. 마을 이장님 소유지라는 이곳은 사람이 이용하지 않아 냉기가 느껴졌지만 어쩐지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있었는데, 김정수가 자신이 얼마 전에 방문해 미리 쓸고 닦아두었다고 말했다.
"이거 생일 선물."
가방을 풀던 김정수가 스웨터를 내밀었다. 김정수의 목도리와 같은 삼색깔이 섞인 실로 만들어져 포근한 색깔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체취가 없는 안드로이드의 손에서 만들어진 스웨터에서는 마을 회관에서 풍기던 따뜻한 보일러 냄새가 배어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에 올라가자 지붕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구석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걸쇠를 열어 문을 열자 어느 새 캄캄해진 밤하늘이 누런 조명의 다락방을 침범했다. 문을 통과해 옥상에 자리를 잡았다. 문을 닫아 불빛을 차단하자 완전한 어둠이 눈앞에 널따랗게 펼쳐졌다. 하루 종일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던 눈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달조차 뜨지 않은 밤이었다. 조심스럽게 지붕에 머리를 대고 눕자 눈이 쌓인 나무들의 그림자까지 사라졌다. 어둠에 눈이 익자 하나둘 박혀있는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우주를 가린 검은 하늘을 찢은 듯 은하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근거리는 지석의 숨소리가 바람 소리와 섞였다. 코끝이 얼얼해지는 것도 모르게 별 하나하나를 눈에 새겼다.
"형."
“응?"
"북두칠성 찾아줄까."
"어떤 건데?"
"저기 일렬로 하나둘 셋 넷 다섯 개 이어진 거 보여? 국자 모양."
"어! 저건가?"
정수와 고개를 붙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영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것 같아 계속 실실 웃음이 났다. 왜 웃냐고 묻는 모습이 더 바보 같아 한 번 더 웃었다.
"여기 이렇게 있으니까 우리 꼭 도서관 옥상에 있는 것 같다."
"거긴 이렇게 별이 보이진 않았잖아."
"그래도 세상에 둘만 있는 것 같은 게 비슷하지 않아?"
하긴 그런 거 같다. 한결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틀자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입꼬리가 보였다.
"생일 축하해, 곽지석. 오길 잘했지?"
그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며 차올랐다. 야속했다. 새벽에는 자신을 죽여달라더니 밤에는 또 영원히 함께 할 것처럼 말한다. 생각해 보면 김정수는 늘 그랬다.
"야... 너 울어?"
"......"
"왜 울고 그러냐..."
김정수가 소매를 끌어올려 얼룩진 지석의 얼굴을 훔쳐 닦았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정수 나 있잖아, 아까 이모님 집에서 그 둘을 보고 나도 형이랑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형을 훔쳐서 같이 살고 싶어. 한번 물꼬를 튼 생각은 멈출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수 많은 하고 싶은 말 중에서 후회하지 않을 선택지 하나를 고르라면,
"형이 나보다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꼬박 하루를 계속 참아온 말이었다.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욕심을 밝힌 건 별들로 가득 찬 하늘 때문이었다. 김정수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여느 때처럼 손을 잡아 올 뿐이었다.
그날 밤 곽지석은 김정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석아, 나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정말 좋거든. 이모랑 제나도 좋고, 뜨개질 배워서 너한테 선물 줄 수 있는 것도 좋고. 이장님이 알려주신 이곳은 평생 내가 가본 곳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야. 내 의지로 온 건 아니지만 의지를 갖는다는 거, 뭔가를 사랑한다는 거, 이제 알 것 같아. 근데 있잖아...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 건물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발견한 김정수는 비슷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김정수였다. 김정수이지만 김정수가 아닌 그가 건넨 쪽지에는 어제의 김정수가 오늘의 곽지석에게 보내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너에 관한 기억들이 내 주요 장치에 저장되지 않았을 리가 없겠지? 겨울이 지나면 벚꽃 보러 가자.
한동안 내린 눈이 조금씩 녹고 얼고를 반복해 녹음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계절, 키가 크지 않은 나무가 있는 집의 철문이 열리고 키가 작은 여성이 나와 우편함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서울에서 온 청년이 마을회관의 공공 안드로이드를 훔친 사건이 일어난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난 뒤였다. 한동안 마을은 소란스러웠지만 이내 곧 새로 온 안드로이드와 함께 소동은 소문이 되어 눈과 함께 녹아내렸다.
거실로 들어온 여성은 창가에 앉아 편지를 뜯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내주신 매실청은 잘 먹고 있습니다. 정수는 그 매실청이 본인이 만든 건지도 모르지만 매실차를 타 마시는 걸 좋아해서 매일 아침 같이 마시고 있어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지난주에는 정수가 전에 일했던 도서관에 다녀왔어요. 정수한테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학생 때 저희가 그곳에서 만났거든요. 역시나 사서로서 일하던 시절의 데이터는 대부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놀랐던 건 저희에겐 제법 중요한 나무가 하나 있는데요. 기다란 가로수에서 그 나무 앞에서 멈춰 올려다보더라고요. 그 나무만 꽃이 펴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괜히 기대를 하게 되네요.
결국 저는 선생님을 닮은 선택을 해버렸네요. 이미 스스로 캐시 데이터를 지운 상태에서 점검을 받아 리셋까지 해버리면 정말 정수가 기억하는 세상이 남김 없이 사라질까 봐 한 선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택을 할 때는 다른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세상에는 저희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훔칠 수밖에 없는 사정의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그래도 알려주신 단체에서 도움을 주시기로 하셔서 재판 건도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공공 안드로이드의 자율권에 관한 선례가 늘고 있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은 봄바람이 따듯해지고 있는데 강원도는 괜찮으신가요? 얼음이 녹을 때까지 건강하시고, 여유가 생기는 대로 정수랑 찾아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편지 봉투에서 떨어진 사진을 옆에 앉아 있던 안드로이드가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벚꽃 나무 아래 삼색털의 목도리와 스웨터를 한 둘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