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리가 없다
DEAR
더 이상 클로토의 수리 문의는 받지 않습니다.
곽지석은 그 문구를 자신의 수리점 안내 공지에 올리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백수천의 부품들을 모아두어도, 언젠가는 소모되고 결국 사라지는 것들은 존재한다. 실상 부재만이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곧 단종된다는 부품을 당장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언젠가'라는 명목을 대며 박스째로 사두고는 했지만, 모든 것은 고작 그때뿐이었다. 낡고 닳아 망가지거나, 아름다운 채 잊혀지거나. 어느 쪽이 더 슬픈 일인지 모르겠다고 지석은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십삼세기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지금, 어떤 인간도 안드로이드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필수재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지구에서 가장 큰 안드로이드 기업인 A사의 기술력과 선견지명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회사의 세 번째 인간형 기체이자, 첫 번째 가족형 안드로이드인 클로토가 이러한 시대의 첫 디딤돌이 되었다. ‘가족형’ 안드로이드의 등장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AI는 감정이 없으니, 외려 감정을 쉽게 받아줄 수 있다는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을 현실화시킨 것뿐이다. 로봇의 기능적 쓸모 대신 감정적 쓸모를 최우선으로 제시하며, A사는 공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갔다. 그 선두에는 정신과 의사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만연한 감정적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라며 긍정적인 평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나 첫 애착을 가족으로부터 형성하지만 아무도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가족을 만나지는 못한다. 그런데 내가 원할 때 나의 아빠, 엄마, 형, 누나, 동생, 자식 또는 연인이 되어 주는 로봇이라니. 구매 시에 얼굴, 목소리, 성격까지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는 옵션까지도 완벽했다. 가격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어차피 가진 놈들은 언제나 배부르고 가난한 놈들은 목소리도 못 내보고 배곯아 죽는 세상이다. 배부르고 남부러울 것 없는, 오직 주는 사랑만 낼름 받고 싶은 사람들이 굳이 누가 서로에게 서로를 맞추려 애쓰겠는가. 덕분에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가족, 클로토’ 라는 광고는 좋게든 나쁘게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것이 너무나 인간 같은 탓에 사실은 곧 죽게 생긴 거지들 얼굴만 뜯어고쳐 만들어진 것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 역시 함께 돌았다. 그게 고작 이십 년쯤 되었다.
이제는 수많은 회사가 서로 다른 차별점을 어필하며 다양한 기종의 가족형 안드로이드 모델들을 생산해 대고 있지만, 클로토를 개발한 A사의 명성을 뛰어넘은 곳은 아직 없다. 클로토가 그만큼 잘 만들어졌으며, 가장 대중화된 첫 안드로이드 모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겠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이미 구시대의 로봇이라는 점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클로토라는 기종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은지는 벌써 십 년, 그리고 눈 부분에 들어가던 부품을 만들던 업체가 도산한 것은 오 년 전의 일이다.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연결 부품 역시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어느새 클로토의 수리는 심히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평범하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휴대폰을 바꾸듯 새로운 안드로이드로 기종을 갈아치웠다. 그러고 나면 고장 난 구형 클로토들은 빈민계층에 버려지듯 팔렸다. 한편, 클로토가 지향하던 ‘가족형’ 안드로이드라는 점이 의외로 클로토를 세상에 오래 남게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로봇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기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인즉슨 로봇을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어 했다는 말이고, 그것을 갈아치울 수 있음에도 일종의 사형선고를 내리고 싶지 않아 했다는 뜻이다. 낼름 사랑을 받아갈 줄만 알았던 이들이 어느새 사랑을 한다니. 계속해서 최신형 안드로이드를 더 많이 팔아댈 궁리를 하고 있던 기업들에게는 나쁜 일임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며칠 전, 드디어 A사는 드디어 클로토의 소프트웨어 작동 전면 중단을 선포했다. 분명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기능하는 클로토는 어딘가에 존재했으므로, 누군가에게 그것은 사형선고였을지 모른다. 돌아오는 이월부터는 모든 클로토가 작동을 중지합니다.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안드로이드 가족을 자신에게 선물하세요. 발랄하게 흘러가는 따뜻한 색감의 광고화면 속 여자의 목소리가 무섭도록 잔인했다.
지석의 수리점에는 꽤 큰 지하 창고가 있다. 일 층에서 철제 문을 열고 기다란 복도식 계단을 타고 내려온 뒤, 다시 경첩이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간이 매트리스와 한 사람이 누우면 꽉 맞을 것 같은 책상이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문과 함께 벽에 붙어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몇 가지 단순한 공구들과 라디오 하나뿐. 그곳에서 지석은 로봇을 분해하고 수리했으니, 일종의 수술대라 불러도 좋겠다. 그 공간을 제외하고는 수많은 부품이 제멋대로 온갖 공간을 아무렇게나 차지하고 있었다. 꼭 골동품 상점을 연상케 하듯 빼곡히 가득 찬 종이 상자들의 혼돈 속에서 무엇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지석만이 정확하게 알았다. 그에게 지하 창고는 불을 끄고도 눈에 훤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거리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머무는 그 삼십 평쯤 되는 공간을 속속들이 모르는 것이 되레 이상하다. 오늘 지석은 수리점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에게 남은 클로토의 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과 간혹 마주했던, 그러나 이제는 수리로도 연명하지 못하게 될 얼굴들을 몇 알고 있었다. 가끔 그 안드로이드와 다정히 손을 잡고 오던 할머니의 얼굴도 이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념에 잠겨 정리하는 일이 미적 해지려던 찰나 지석의 워치가 울렸다. 손님이 있다는 호출이었다. 지석은 튕겨져나가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쪼그려 앉아 있던 탓에 무릎이 삐걱거렸다. 회끼 도는 물 빠진 노란 머리를 괜히 먼지라도 내려앉은 양 털어내다가 몇 번의 재채기 하고서 그 지하 창고를 나섰다. 어쨌거나 클로토 수리는 더 이상 아무도 문의하지 않겠구나 생각했고, 어딘가 공허한 마음이 스쳤다.
호출에 얼굴을 비추기 위해 지하에서 지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솔직히 너무 멀었다. 그 이전의 주인이 지하에 얼마나 대단한 것을 지하창고에 보관했는지는 몰라도, 지석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어떤 조치를 취하는 대신 그렇게 내버려둔 것은 외부와 단절된 그 지하가 퍽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으면 햇볕도 바람도 타인도 없이 외로움에 푹푹 찌든 채로도 잘만 살아남을 것 같았다. 반면 수리점 일 층은 지하와 비교하면 아주 작았다. 고작해야 사람 셋 정도가 넉넉히 서 있을 수 있을 만한 정도의 크기. 한 번에 한 명의 손님만 상대하는 지석에게는 딱 알맞은 사이즈 였을 수도 있겠다. 인원은 늘 자신, 손님, 그리고 인간을 같은 기계 하나. 그 이상의 과적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준 미달인 경우는 또 처음이라 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섰다. 거기에는 남자 하나만 물끄러미 서 있다. 착 가라앉은 차분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보다 반 뼘 큰 키, 조금 째진 듯한 눈과 둥근 뺨을 훑어보고 있으면 그가 이렇게 묻는다.
"수리점에 이런 걸 물어서 죄송한데요,"
죄송함을 먼저 말하는, 조곤조곤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차마 말을 끊지 못하고 무슨 일이세요, 하고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면 돌아오는 물음은 이렇다. 지석은 맥 빠진 한숨을 쉬었다. 굳이 그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앞에 선 사람의 눈은 어딘가 간절했다.
"혹시 안드로이드 장례를 치러주시나요?"
수리도, 폐기도 아니고 장례라니. 퍽 귀찮은 일이다. 잠시 고민하던 지석이 카운터 위에 놓인 전자시계를 흘끔 바라보았다.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동시에 아직 점심도 먹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수리점 안에 누군가를 가만히 세워둔 채 상담을 진행하는 것은 너무 불편한 일이었으므로 지석이 먼저 웅얼거리듯 말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나가서 차라도 한잔하시죠. "
뒤쪽 벽에 걸린 검은색 롱코트를 주섬주섬 챙겨입고 있으면, 앞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수리점 밖으로 나섰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겨울 냄새가 스며들었다.
A사의 클로토 소프트웨어 작동 중단 선언에 오히려 안드로이드 업계의 주가가 성장세로 돌아섰습니다. 반면 금전적 이슈로 아직까지 구형 안드로이드인 클로토를 사용하던 노인이나 빈민계층에서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이며…
정시마다 공중파 뉴스와 매 사건·사고를 요약해 주는 AI 어시던트가 자신의 명확한 발음을 뽐내듯 딱딱하게 브리핑을 이어가는 목소리가 주변 소음과 섞여 들었다. 카페 안의 공기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말소리는 언제나 시끄럽다. 지석은 메뉴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가공육 샌드위치를 시켰다. 순순히 지석을 따라온 남자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주문했다. 둘은 조용히 이야기하기 적당한, 해가 들지 않는 구석의 소파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남자는 지석의 설명을 기다리는 듯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샌드위치가 만들어지기까지 분명 짧은 여유가 있었으므로 지석은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전자 패드를 꺼내 펼쳤다. 그 안에 안드로이드 장례에 관한 서류가 들어있었다. 어디 보험 약관에서 보았을 법한 지루한 단어들이 점점이 찍혀 있는 서류화면 켠 지석이 숨을 한번 깊게 내쉬고, 사무적인 투로 말을 뱉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를 안드로이드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안드로이드의 마지막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폐기와 장례. 둘 중 어떤 쪽이든 수리공의 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듯이, 로봇 역시 자신을 만들었던 인간의 손에 의해 분해된다. 폐기라는 말은 온전히 쓰레기통으로 향한다는 말이다. 그 문자 그대로 세상에 어떤 정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일로, 그저 쓸만한 부품 몇 개를 해체한 뒤 나머지는 고물이 되어 오로지 금속의 무게 가격을 매겨 팔려나간다. 남는 것은 없으나 수고스러움이 덜하므로 가격이 붙지는 않는다. 오로지 그뿐이다. 그러나 장례의 경우는 다르다. 그건 안드로이드의 삶이라고 볼 수 있는 과거의 기억을 가치 있게 여기겠다는 뜻이다. 내장된 메모리의 동영상을 스캔 및 편집하여 그 기억을 의미 있어 할 주인에게 돌려주고, 안드로이드의 일부는 일종의 장식품으로 만들어져 보관된다. 가치 있는 인간이 죽어 이름을 남긴다면, 의미 있는 로봇은 죽어서도 인간의 주변에 머무는 무언가가 된다. 그러니 작동하는 동안 얼마나 인간에게 사랑받은 로봇인가를 증명하는 셈이다. 이는 번거롭고 손도 많이 가는 일이기에 그에 합당한 보수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가격 조정이 무척 까다롭고 안드로이드의 기억을 스캔하는 일도 꽤 힘든 일인지라, 차라리 안드로이드 장례를 받지 않는 수리점도 제법 있었다. 지석이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다가, 남자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는 대답이 곤란한 듯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드로이드, 본인입니다.”
지석은 그 말에 남자의 눈을 한참이나 빤히 들여다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접어 닫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가공육 샌드위치와 모과차가 점원의 손에 들려 식탁 위에 올려졌다. 맛있게 드세요. 점원의 친절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지석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확신하는 듯, 한 번 더 못 박으며 이야기했다.
“제 이름은 김정수고요, 클로토에요.”
김정수. 지석은 그의 이름을 입속에서 곱씹어보았다. 자신이 안드로이드, 그중에서도 정확히 클로토라는 기체를 콕 집어 자신이라고 밝힌 이 남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석은 샌드위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문댔다. 매일 같이 기계를 만져대는 거친 손바닥 안에서 얼굴이 구겨지는 느낌은 좋지 못했다. 지석은 생각했다. 초창기의 많은 가족형 안드로이드에게 이름이란 자신으로 대체된 존재를 의미한다. 초기 안드로이드를 구매하는 많은 이들이 원래 있던 사람에 대한 정보를 덮어썼다. 가족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상처를 지우거나, 회피하기 위해 안드로이드를 사용하는 일은 의사들에게 긍정적 조언을 요구한 A사의 마케팅 전략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로봇의 시스템적 오류였는지, 혹은 다른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열에 하나쯤의 클로토 기체들은 본 적도 없을 그 이름의 주인에게 애착이 있는 듯한 말과 행동을 보였다. 그 말인즉, 안드로이드들은 자신이 기계임을 완벽하게 인지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큰 항의나 애로사항 없이 클로토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토가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바라오던 인간을 완벽하게 흉내 내며 로봇의 일을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로봇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과연 로봇의 일인가? 아니다. 아님이 틀림없다고 우리는 정의 내렸다. 자아를 가진 로봇은 즉시 폐기 대상이다. 지석은 괜히 성질을 내듯 포크로 샌드위치의 겉면을 쿡 찍어보며 그에게 물었다.
“왜 본인이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해요?”
그는 그 질문을 들을 줄 알았다는 듯이, 일말도 고민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그러나 둥근 눈동자는 빛없이 검기만 하다. 꼭 슬픔을 좀먹은 블랙홀처럼.
"저는 대체되었으니까요."
김정수는 말을 마치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잔의 온기를 더듬는 듯 보이는 그의 손가락을 흘끔 보았다. 손등은 햇볕을 받지 못한 듯 창백하게 보였으나 손끝은 따뜻한 찻잔의 열기 때문인지 미세하게 붉었다. 지석의 시선이 바로 그 손끝에 머물렀다. 여러 안드로이드를 수없이 분해하고 수리해 왔다. 더구나 클로토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자, 정확한 사실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 역시 어쩌면 수리공의 역할일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무엇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는 체온 조절 시스템이 완벽합니다. 외부 환경에 의해 체온이 미세하게 변화하는 인간과는 달리,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죠. 특히 손발 같은 말단 부위에서는 더욱 인간과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나요."
지석이 뒷말을 굳이 이어가지 않고 그의 손끝에 머문 시선을 일부러 더 오래 두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분명 매끄러웠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그렇다면 A사의 초창기 클로토는 인간적 위화감 최소화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도 아시겠죠. 그 시기의 클로토에는 옵션이 아니라도 일부러 생체 반응을 모방하는 기능을 탑재했잖아요. 눈물이나 땀, 체온 변화, 뿐만아니라 먹고 자는 일까지도요. 그리고 저는 이제 곧 작동이 중단될 구형 기체인걸요. 어쩌면 시스템 오류일 수도 있겠죠.”
김정수는 양손으로 찻잔에서 그만 손을 떨어뜨리고는 아직도 지석의 눈길이 향해있는 손끝을 감췄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없이 검었고 그 속을 알아챌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지석은 빵을 찌르던 포크를 완전히 놓아버렸다. 식욕은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실 그가 인간인지 클로토인지 확인하는 방법이야 아주 간단하다. 안드로이드에게 삽입되어 있을 메인 칩셋을 진단 스캔해 보면 그만일 일이다. 아무리 오래된 안드로이드라도 칩 안의 일련번호 정도는 남아있을 테니까. 그러나 메인 칩셋을 스캔하는 것은 보호자의 동의 없이는 불법이다. 게다가 그가 만약 진짜 자신의 장례를 맡기고 싶은 안드로이드라는 가정하에, 어딘가의 또 다른 수리공에게 보호자 없이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 보호자의 통제를 벗어나 자아를 가지게 된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석은 그 이상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다가 느린 어조로 물었다.
"제가 왜 본인이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대체되었으니까’라고 답했죠. 그 '대체'라는 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제가 진짜 김정수가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면 진짜 김정수 씨는 어떻게 됐나요."
잠시 정적 속에서 카페 내부의 시계가 정각을 울렸다. 김정수는 지석을 바라보는 대신 자신의 찻잔을 내려다보았고, 한층 무거워진 듯한 공기는 상관없이 담담한 투였다.
"그게 중요한가요?"
"저는 당신이 안드로이드라는 증명이 필요하니까요."
"그럼,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올게요."
그는 증명 따위야 어렵지 않다는 듯 곧바로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챙겨야 할 짐은 없었다. 그가 이 날씨에도 얇은 외투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지석이 자신의 외투를 잠시 흘끗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이, 그는 카페 문을 열고 사라졌다. 차는 입도 대지 않은 채 남아있었고, 그의 유독 붉었던 손끝이 자꾸만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그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한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괴로워질 것 같았다.
찬바람 탓에 붉어진 코끝을 괜히 문지르며 버스의 배차간격을 확인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는지 몇 분 뒤 도착한다는 안내가 전광판 위에 밝은 글씨로 떠 있었다. 집에서부터 지석의 수리점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오가는 것은 소프트웨어 종료가 선포될 만큼 낡아빠진 안드로이드에게는 꽤나 큰 리스크겠으나 클로토의 장례를 치러주는 수리점을 찾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에너지를 쓰는 것은 무리였으니 지석과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딱 한 시간뿐. 인간처럼 숨을 끌어올려 크게 내쉬었다. 가끔은 그런 행동이 모방인지 아니면 필요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체내의 배터리 소모가 갈수록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간 점검이나 수리를 받은 일 없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풍경이 흐릿해 잠시 눈을 내리감고 햇살이 비치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그나마 클로토가 식사뿐 아니라 태양광을 이용해 보조전력을 충전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에너지를 비축해야만 어딘가에서 갑자기 전원이 내려가 풀썩 쓰러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햇볕 아래 눈을 감고 있으면 늘 떠오르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이다. 그래, 나는 분명 ‘진짜’ 김정수를 본 일이 있다.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앳되며 희고 둥근 얼굴로 기억되는 그는, 자신보다 애교 넘치고 귀염성 있으며 다정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가족의 형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는 충분히 그 안에 들어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분명한 사고임이 틀림없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마치 고장 난 구형 모니터처럼 노이즈 필터가 낀 것 같다. 모든 것은 뚝뚝 끊기는 이상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 안에 김정수의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가 있다. 엄마는 나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까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백십사 번 버스가 곧 도착합니다.
정류장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기계음의 안내멘트에 느리게 눈꺼풀을 들었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흐릿하다. 혹시 안구 부분에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려본다. 멀리서 초록색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여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는 곳 앞에서 손목을 가져다 댔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교통 요금이 빠져나갔다. 빈자리에 앉으면 버스가 공중으로 뜨는 것이 느껴진다. 눈을 감으면 동시에, 몸이 뒤로 쏠리는 느낌이 든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출발합니다. 익숙한 안내음을 뒤로하고 나는 김정수에 대해 생각한다. 그 다정하고 희끄무레한 형상에 영원히 눌려있는 것 같다. 차라리 그것을 아주 미워하고 원망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가장 오래되었으나 아주 선명한 기억이 감은 눈꺼풀 아래에서 재생된다. 모든 것은 불안과 함께 시작한다. 정신과 로비에 앉아 진료를 받으러 들어간 부모님을 기다리며 볼륨 없이 커다란 화면으로만 보이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고 있었다. 어쩌다 거기에 따라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에 앉은 대부분의 자신의 전자기기를 향해 시선을 집중해 있었고, 나는 배우의 입 모양을 읽어보려 눈을 더 크게 뜨고 있던 중이었다. 카운터에 앉은 직원 둘이 대화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오로지 우연이었다.
“… 충격으로 목소리가 안 나오신대요.”
다른 한 사람이 탄식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대번에 그것이 엄마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여전히 시선은 화면에 놓여있었지만,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글자 몇 개가 귓가를 간지럽히다 사라졌다. 그들은 더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다가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자신의 손을 잡고는 진료실 앞에 섰다. 왜요? 묻고 싶었으나, 들어가 보라는 듯한 얼굴에 손잡이를 돌려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흰 가운을 입은 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의사, 그 앞에 앉아 안색이 어두워 보이는 아빠 그리고 진료 소파에 앉아 눈물범벅인 엄마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에게 다가가면, 그녀는 입술을 버끔거리다가, 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정수 왔니?"
그 네 글자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잠시 자리에 멈춰 섰으나, 정적만이 흘렀다. 세 명의 어른, 여섯 개의 눈동자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지금 나를, 김정수가 될 것이라 믿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이 순간 이곳에 서 있는 것은 오로지 김정수여야만 할 것 같았다. 착한 아이처럼 억지로 미지근한 미소를 지어내듯 입꼬리를 구겨 올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녀가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김정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는 그렇게 김정수가 되었다.
자꾸만 재생되는 과거의 영상을 끊어내지 못하고 내릴 곳에서 한 정류장을 지나치고 말았다. 걷기에는 멀었고, 다시 버스를 타기에는 기다림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 버스가 자신을 내리고 떠나가는 것을 멍청하게 바라보았으나 마땅한 답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되는대로 걷기를 선택한다. 찬 바람이 껍데기를 스친다. 김정수로서의 삶에 대해 딱히 유감은 없다. 로봇은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그저 인간에게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그 삶의 역할을 다했는지 증명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자꾸 속이 공허한 것은 왜일까. 눈앞이 흐리다가, 뺨을 타고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린다. 무표정하게 그것을 닦아냈다. 이제 대체품의 역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김정수라는 이름을 가진 클로토에 대해 좀 알아봐 줘."
수리점에 제법 자주 들락거리는 준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다 했다. 배달부터 해킹까지, 능력도 제법 좋아서 그를 알고 지내는 것 자체로 인맥에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준만큼 개인 정보에 철저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웬만해서는 얼굴을 다 덮는 검은색 오토바이 헬멧을 벗지 않았고 가끔 감정이 격해지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헬멧 앞 유리를 들어 눈을 빼꼼 내비치는 것이 다였다. 때문에 그를 그렇게 오래 알았음에도 그의 얼굴보다는 그 헬멧과 목소리로 기억했다. 다만, 그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도 높낮이가 심한 편이라 감정이 쉽게 티가 나는 편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편하기도 했다. 그는 지석이 내뱉는 명령조의 부탁에 허, 하고 한숨을 뱉으며 팔짱을 끼고 카운터에 기대섰다.
"형은 그런 이름이 한 둘인 줄 알아요?"
그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며칠 만에 본 얼굴이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것을 보니 요즘 일감이 별로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에게로 시선을 향하지도 않고 컴퓨터로 작업 일정을 정리하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냥 정보만 리스트로 뽑아다 줘도 돼. 비교는 내가 할게."
"그건 왜 필요한데요?"
그의 가벼운 질문에 모니터에서 시선을 들었다. 무표정하게 카운터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앞에 서 있던 김정수의 동그란 얼굴이 잔상처럼 그려졌다. 굳이 변명이나 거짓말로 의심을 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을 말할 필요도 없다. 지석은 짧게 답했다.
"장례 문의가 들어와서."
준은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문이나 정보에 대해 아무리 빠삭하다지만, 모든 것을 캐묻는 인간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대신 보수는 넉넉히 주셔야 해요, 하고 농담 아닌 진담을 말했을 뿐이다. 다시 화면 속 일정표로 눈을 돌리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카운터 위에 부품 박스를 올려둔 채 한참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떠들다 다음 일이 있다며 사라졌다. 그동안 지석은 계속해서 자판을 누르며 고작해야 장단을 맞추는 정도의 추임새를 뱉었을 뿐이었다. 준이 떠나고 나면 곧바로 수리점 앞의 철제 셔터를 내렸다. 네온으로 반짝이는 앞쪽 거리와 달리 지석의 수리점은 꼭 존재하지 않았던 양 불을 껐다.
준이 저를 위해 가지고 온 부품 박스를 품 안에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철제로 된 부품이 든 것 치고 무겁지는 않았다. 아마 얼마 되지 않은 양이어서겠지. 건네받은 것은 다름아닌 클로토의 부품들이다. 곧 작동을 멈출 클로토이기에 수리를 맡길 사람도, 맡을 사람도 없기에 그에 따르는 부품은 고철로 버려지는 것이 마땅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모아달라 부탁한 것은 그 부품이 당시쯤 생산된 다른 안드로이드 기기에도 쓰이곤 하기 때문이었다. 클로토만큼 나이를 먹은 다른 안드로이드가 존재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돈을 벌고 싶다면 신형 안드로이드의 부품을 창고에 쌓는 것이 나은 처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석은 늘 어떤 가능성을 버리지 못했다. 하나의 로봇이라도 더 오래 세상에 남길 수 있다면…, 그런 식으로라도 누군가에게 영원을 기약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지하창고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은 나의 그런 사념들이 기계 부품으로 실체화되어 온갖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차갑고 건조한 겨울 냄새가 났다. 가끔은 그게 ‘없음’을 뜻하는 냄새 같았다. 지하에서 부품을 보관한다는 건 녹이 스는 일을 조심해야 했다. 공기 중의 산소와 습기는 철을 산화시켜 쓸 수 없게 만들었고 그렇기에 그 많은 상자를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모든 상자를 매번 열어볼 수는 없다. 그 때문에 보관 시 낮은 온도와 낮은 습도를 유지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쓰이게 될지, 과연 쓰일 수는 있을지는 항상 의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없으면 안 되는 것이나 오로지 그것만으로는 쓸모가 없는. 어지럽게 쌓인 박스 더미들 사이에 들고 온 새로운 박스를 내려놓았다. 그중에도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종이상자를 흘끗 바라보았다가, 작은 문을 열고 더 안의 불 꺼진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만이 꿈 없이 잠들 수 있는 곳이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지구는 같은 속도로 자전하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아침에는 셔터를 올려야 했고, 지하창고에서 수리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로봇들을 손보았다. 정오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왔다. 김정수는 여전히 얇은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카페로 향해 어제와 같은 자리에 마주 앉았고, 이번엔 샌드위치 대신 각자 따뜻한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었으나 누구도 음료에 손대지 않았다. 지석은 어제의 질문을 되풀이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떤 증거를 가져오셨나요. "
"지석 씨는 로봇이 아니라 인간 수리공이니 제 말을 그대로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정수는 어제처럼 미소 지었지만, 오늘따라 그 입꼬리는 더 얇게 굳어 보였다. 그는 카페 테이블 아래에서 자꾸만 손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움츠렸다.
"글쎄요, 제가 의심할 정도로 당신이 인간과 유사하다면, 필요한 쪽이 증명해야죠. 제품 코드 번호라거나, 최소한 인간이 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야죠. 당장 저한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가던 지석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김정수가 식탁 위로 손을 올려 보였다. 시선 끝에 닿는 어제보다 더 창백한 듯 보이는 그의 손끝, 그것을 뒤집어 내미는 그의 손바닥 위로 붉은색 얇은 실선 같은 금이 선명했다. 지석은 고장 난 사람처럼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그다음 공백을 아무렇지 않게 채운 쪽은 정수였다.
"지석씨도 아시다시피, 저는 곧 폐기 예정인 구형 기체예요. 안구 부품 문제로 자주 액체가 새고, 매일 세 시간을 움직이는 게 어려울 정도로 배터리 소모가 심하죠. 어제 제 일과표를 조정했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차분하고 평이한 어조의 목소리였다. 멍청하게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석에게 김정수는 자신의 말을 일정한 속도로 뱉어냈다. 그건 꼭 학습된 말 같기도 했다.
"매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필수 기능 점검을 해요. 특히 통각 센서의 작동 여부 같은 것이요. 저는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과는 다르게도요."
그러나 지석에게는, 더 볼 것도 없이 확실해졌다. 어떤 로봇에게도 재생 기능 따위는 없다. 얇은 절상 옆으로 앉은 검붉은색 딱지가 그가 너무나 확실한 인간임을 증명했다.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눈동자를 보고 대답했다.
"아뇨, 당신은 인간이에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정신과에 가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김정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항변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그런 표정들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언제나와 같은 미묘한 미소를 얼굴 위로 올려 보였다.
"…그럼 다른 수리점을 알아봐야겠네요."
정수는 꼭 지석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석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리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가 다른 수리점을 알아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인간이라면 자신이 가타부타 끼어들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자리를 뜨려던 정수가 문득 뒤를 돌아 지석에게 물었다.
"지석씨는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아니요."
곽지석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 있길 바라지만 무엇도 무언가를 대체할 수 없다, 는 뒷말은 꾹 눌러 삼켰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등을 돌린 그의 발걸음이 하나씩 멀어졌고, 카페 문을 열고 나서는 것이 자리에서도 보였다. 창밖으로는 눈이 오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김정수의 부식이나 장례 따위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여전히 날씨보다 현저히 얇은 그의 옷차림이 생각났다. 식탁 위에는 커피 두 잔만 그대로 남아 차갑게 식어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렸다. 조금씩 굵어지는 눈 알갱이에 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하늘은 회색빛이 짙어 해가 보이지 않았다. 지석의 말처럼 붉게 물든 손끝을 손바닥 안으로 말아쥐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내일부터는 다른 수리점을 다시 알아봐야지. 그래도 이월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으니까, 서둘러 발품을 팔면 장례를 치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남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내가 그를 허투루 대체해 오지 않았다는 증명을 남겨야 나의 두 번째 이름에 나도 조금은 발붙일 수 있지 않을까. 고작 하루 세 시간짜리 뒤늦은 허우적거림으로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곽지석은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한치에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으나,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완벽해지고 싶었다. 초록색 버스는 오차 없이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고, 언제나처럼 타는 곳 앞에서 손목을 찍었다. 기계음과 함께 요금이 빠져나갔다. 자리에 앉으면 버스가 덜컹거리며 상승한다.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기 위해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들을 눈에 꼭꼭 담았다. 모두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언젠가는. 내려야 하는 정류장까지, 지나치는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써보지만, 그것들이 그저 더미 메모리가 되고 말 것임을, 나도 안다.
십여 년째 오가는 집 앞의 삼 미터가 될까 한 짧은 건널목에서도 꼭 신호를 지켜 건넜다. 부모님의 엄격한 명령 아래 뛰지 않고 얌전히 걷는 것이 나의 착한 아이로 향하는 과제 중 하나였다. 정수는 착한 아이지?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힘주어 끌어당기던 손의 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멈춰 세웠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어도 나는 그 압력이 사라져야만 길을 건넜다. 그들이 말하는 김정수가 되어야지. 그들이 원하는 김정수가 되어야지. 나는 김정수고, 김정수는 완벽하게 착한 아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집 현관문을 열 때까지, 언제나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면, 이제는 예순을 바라보는 그들이 여전히 나를 김정수라고 부른다.
"정수 왔니."
"네, 엄마."
나는 아주 익숙하게 미지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그녀는 대답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내가 건너온 그 짧은 횡단보도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뒷모습은 꼭 하염없이 진짜 김정수를 기다리는 것 같다. 모든 것은 매일 반복 재생되는 영상 같고, 이월이면 모든 것이 종료될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나는 감히 그것을 판단하는 대신 방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는다.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무시하며 인터넷을 뒤져 장례를 치러줄 만한 곳을 찾으려 애썼다. 꼭 수리점이 아니어도 좋다. 합법적인 사이트들에서는 대부분 보호자 동의서를 상담 문의 바로 아래에 끼워놓았으므로 상담을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불법적인 것도 괜찮다.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웹을 하염없이 살피다 보면 검색에 걸리지 않지만, 장례 후기가 남아있는 불법 수리점 몇 개를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비행기를 타야 할 만큼 멀었고, 하나는 남아있기는 한 건지 위치조차 확인할 수 없었으나, 마지막은 곽지석의 수리점을 찾아갔던 동네와 멀지 않았다. 화면 속 지도를 빤히 바라보며 찍혀있는 주소를 되새겼다. 문득, 카페에서 지석이 ‘당신은 인간이에요.’라고 말하던 단호한 목소리가 떠올랐으나 중요치 않았다. 손도 닿지 않는 날갯죽지 부근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어깨를 쭉 펴고, 다시 컴퓨터 화면 속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다른 수리점을 알아보겠다며 사라진 김정수를 잡지 않고 보낸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사흘 동안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가 잠시 그쳤다가를 반복했다. 폭설 경보가 전 지역에 내려졌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한 걱정 따위의 감정은 여유가 많은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애초에 로봇도 아닌 인간을 걱정할 만큼 인생이 한가롭지 못하다. 차라리 진짜 안드로이드였다면 그에게 성심성의를 다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오늘도 저녁까지가 마감 기한인 수리 작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창고의 수술대 위에 부활을 꿈꾸며 누워있는 생활 기능성 로봇의 복구에만 최선을 다하면 오늘이 끝날 것이다. 지석은 정리되지 않은 미세한 전선들을 클램프로 집어놓고 핵심부품의 결함을 확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핀셋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워치가 울렸다. 준의 가벼운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형, 저 오늘 눈 때문에 못 갈 것 같아요. "
"그래."
덕분에 기한이 늘었지만, 그렇다고 뒤로 미룰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수많은 기계들이 줄을 서 있다. 조명을 더 밝혀 핵심부품 내부를 들여다보며 짤막하게 답했다. 준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음성 연결을 끊지 않았다. 한 박자 느리게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형이 알아봐 달라던 거 있잖아요. 김정수란 이름의 클로토는 안 남았대요. 하나 빼고는 장례 절차 밟거나 폐기 됐어요."
사실 이제는 의미 없는 정보였다.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했으니까. 그래도, 정보를 캐내는 사람이 예외를 두었다는 것은 물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라는 것도 알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장단 맞춰주듯 되물었다.
"하나는?"
"그, 옛날 사건 기억해요? 클로토가 사람을 구하고 복구불능이 된 사건이요. 안타깝다고 말이 좀 있었는데. 암튼, 사건의 클로토더라고요."
"그럼 폐기 된 거 아니야?"
"그게, …폐기를 안 했더라고요."
"뭐?"
"정보가 없어요. 메모리 칩이랑 부품들이 완전히 박살 나서 A사에서 폐기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했던데, 폐기를 안 했어요. 이상하죠."
신나게 이야기하던 준이 말을 멈추니 잠시 침묵이 오갔다. 폐기되었을 것이 당연한데도, 폐기되지 않은 클로토. 그 말은 메인 칩이 어딘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그 보호자가 로봇을 끔찍이 아꼈을 가능성을 차마 배제하지 못했다.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씹었다. 말이 툭 튀어 나갔다.
"일련번호는?"
"남아있어요."
"혹시 그거, … 메일로 좀 보내줄래."
"옙. 바로 보낼게요. 정보요금 입금해 주셔야 해요."
연결을 끊는 준의 음성은 어딘가 신난 듯한 투로 들렸다. 진행하던 로봇 수리를 잠시 중단하고 패드로 전송된 메일을 확인했다. 두세 번의 새로고침 끝에 한 건의 새 메일이 떴다.
김정수 : C-000626
이름 뒤의 간결한 일련번호를 클릭하면 정보창 이전에 입금 안내 창이 떴다. 이럴 때는 그가 참 약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런 정보들에 돈을 받는 게 준의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한 번씩 벽에 턱 막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메일의 링크는 A사 서버의 클로토 정보와 직통으로 연결된 듯 보였다. 해킹은 엄연히 불법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손안에 들어온 궁금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석은 빠르게 지문을 눌러 결제를 마치고 내용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자신이 아는 정수가 아닌, 어리고 앳된 처음 보는 소년의 외형이 뜬다. 칩셋이 스캔 될 때마다 로봇의 상태가 나열된 정보란은 15년 전, 메모리 칩 및 주요 부품이 복구 불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파손되었다는 내용에서 멈춰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다는 안도감이 뒤늦게 차올랐다. 창을 닫으려던 찰나, 오늘 날짜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불량 클로토, 강제 수거 조치 필요**
지석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앉아 있던 의자가 뒤로 쾅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면 안만 빤히 들여다보았다. 발신된 서버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보아야 할까? 괜히 알지도 못하는 일에 참견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 이게 내가 아는 김정수일까? 그는 로봇인가? 그가 로봇이어야만, …내가 그를 걱정할 수 있는가?
눈이 발목까지 쌓여 밟으면 푹푹 꺼졌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들 하루 종일 내리는 눈에는 방법이 없었다. 제설차가 종일 도로를 돌며 눈을 치우고, 공무용 제설 안드로이드가 충전 시간만 제외하고 끊임없이 일했으나 여전히 불편을 감수해야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길을 뚫고 집 밖으로 나섰다. 눈이 그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집 안에 갇혀있는 것도, 덕분에 하루하루 다가오는 날짜를 세는 것도 버겁게만 느껴지던 탓이었다.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목표를 미뤄둔 채로는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이 날씨에도 버스는 충실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정류장에 내리고 나서는 패드가 최단 경로로 표시해주는 길을 따라 걸었다. 신발 앞 코가 더럽게 녹은 물과 눈이 범벅된 탓에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걸었다. 위치에 도착하면 경로 안내가 끝났다는 파란색 안내창이 떴다. 패드에서 눈을 떼고 살피면 오래된 시멘트벽에 아무렇게나 그라피티가 그려진 낡은 창고가 거기에 있다. 창문은 까만 선팅으로 내부는 보이지 않았고 거대한 철문 덕분에 견고하게 느껴졌다. 과연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문을 밀어 열었다. 끼이익 거리는 낡은 경첩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계세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공간이 꽤 넓음에도 느껴지는 퀴퀴한 약품 냄새가 났다. 카운터 너머 더 안쪽의 어두운 방 안에서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철문은 쾅 소리를 내며 닫히고, 안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울렸다.
"누구쇼."
"그, 수리점에 이런 걸 물어서 죄송한데요,"
아까보다 목소리를 조금 더 커다랗게 내며 말했다. 한 문장이 끝나고 혹시나 안쪽의 수리공이 밖으로 나올까 싶어 잠시 침묵했으나, 상대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더 큰 목소리를 내 물었다. 자신의 음성이 창고 안에서 웅웅거리듯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혹시 안드로이드 장례를 치러주시나요?"
그제야 남자가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대머리에 나이를 먹었음에도 험상궂게 보이는 인상은 그의 수리점이 불법임을 다시 상기하게 했다. 정수는 가만히 서서 답을 기다렸고, 남자는 정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손님에게 건네기엔 다소 짧게 여겨지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로봇은?"
"제가, 안드로이드 본인입니다."
"클로토 기체치고는 너무 인간 같네. "
"…."
"하기야, A사가 초창기에 이상한 짓을 많이 했지."
남자는 제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혼잣말로 이야기하고는 카운터 안쪽 문을 열며 들어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별다른 설명 없는 행동에 잠시 망설였으나,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린 사람처럼 엉거주춤한 발걸음으로 그 안으로 들어서면, 남자가 그의 손목을 채듯이 잡고 더 안쪽 방으로 걸음 한다. 이끌려 들어선 방 안에는 화학약품 냄새가 지독했다. 벽에 걸린 수많은 연장이 어두운 조명에 음산하게 보이고, 아무렇게나 놓인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에서만 쨍한 백색의 빛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가만히 세워두고는 컴퓨터 앞의 의자에 앉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돈은 얼마나 있나?"
"장례를 치르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충분?"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하하, 소리를 내 웃더니 팔짱을 끼고 돌아보았다. 그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 싸늘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메모리 추출하고, 가공해서 유족한테 보내고, 그게 다 기술이고 시간인 건 둘째 치더라도 말이야. 일반적인 수리점도 아닌데 여기까지 왔다는 건 너도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지."
"…"
"충분한 금액이라는 건 없어, 내가 만족할 금액이어야 할 뿐이지."
예상치 못하게 쏟아지는 말들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흐르는 정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손을 쥐었다가 폈다. 통장에 남아있던 잔고를 가늠하던 찰나, 빤히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가 먼저 말을 이었다.
"일단 상태나 볼까. 칩셋이 살아있는지나 봐야 견적이 나오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 가운데에 놓인 철제 탁자 위를 턱짓했다. 올라가라는 뜻인가? 아니면…. 어쩔 줄 모르고 부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해 섰다. 남자는 짜증을 내듯 그 위로 올라가 엎드리라 명령했고, 그제서야 엉거주춤하게 지시를 따랐다. 남자는 팔뚝만 한 구형 스캐너를 들고 손으로 그의 등 면을 훑었다.
"……포트가 없군. 무선 연동 모델인가?"
남자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스캐너의 출력을 높이고는 그대로 등 부분에 가져다 댔다. 날갯죽지가 저릿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고통은 느끼지 않도록 설계되었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과한 전류가 통하는 것 같은 이 감각은 심히 불쾌했다.
삑- 삐비빅-
순간, 갑작스럽게 스캐너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시릴 정도로 희게 빛나던 모니터 화면이 붉게 점멸하더니 A사의 로고와 함께 경고 문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도망치지 않으면, 끔찍한 꼴을 당하겠다는 본능이었다. 누워있던 탁자에서 몸이 굴러떨어지듯 바닥으로 내려와 출구를 살폈다.
[경고: 강제 수거 대상 식별. 일련번호 C-000626]
반면 남자의 눈은 크게 뜨였다. 본사에서 직접 내려진 ‘강제 수거’ 명령이 그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가 형형한 눈빛을 띠었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거칠게 목덜미를 잡아챘다. 차마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그의 힘을 당해낼 에너지가 없어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발버둥 쳤으나 그가 손아귀에 더 힘을 주며 소리 질렀다.
"도망갈 생각 말고 얌전히 있어! A사 수거팀이 오면 너도 편하게 가는 거야."
강제로 바닥에 엎어지자 윽윽거리는 앓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편하게 간다는 말은 곧 폐기를 의미하는 게 뻔했다. 이런 식으로 사라질 수는 없었다. 불량품으로서의 삭제. 그것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벗어나 보려는 발악으로 팔을 휘둘렀으나 맥없이 공중을 가를 뿐이었다. 남자는 그런 발버둥이 아주 짜증 난다는 듯 들고 있던 구형 스캐너를 휘둘렀다.
"이 깡통 새끼가!"
피하려고 몸을 돌렸으나 남자가 더 빨랐다. 거대한 기계가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에 부딪혔다. 머리가 울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부딪혀 찢어진 머리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남자는 바닥에 떨어지는 액체를, 그리고 자신이 휘두른 스캐너 끝에 묻어난 붉은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름이 아니었다. 냉각수도 아니었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명백한 피였다.
"……사람?"
남자의 당황한 틈을 타 그를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뜨뜻한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뒤에서 욕설과 함께 무언가 던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지독하게 났다.
눈은 당장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쏟아지는 것 같았다. 하얗게 가려지는 시야와 발이 눈 속으로 파묻히는 와중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찍혀있던 주소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으나 속도를 낼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럼에도 걷는 것은 그것의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일념이었다. 아니, 걱정인가. 그가 로봇이기를 바라는 것인지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폐기되지 않기를. 사라지지 않기를. 자신도 속으로 기도하며 모르게 신의 존재를 찾고 있었다.
낡은 창고들이 늘어선 공터에서 흩날리는 바람과 눈 사이로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얇은 옷 하나만 걸친 채, 걷고 있는 어떤 인영이 보였다. A사의 기록이 거짓일 리는 없다. 그러나 기록이 사실이라면 지금 저 눈보라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남자는 대체 무엇일까. 자신이 미쳐서 보게 된 과거의 망령, 혹은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고철. 그러나 그의 붉은 손끝과 손바닥 위에 앉았던 딱지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가 로봇이든, 아니던 간에.
"김정수!"
그의 이름을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러나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가 목소리를 쉽게 지워버렸다. 푹푹 꺼지는 걸음으로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그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잡았다. 정수가 흠칫거리듯 뒤를 돌았다. 하지만 더 놀란 쪽은 나였다. 그의 이마와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는 피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시선이 내리는 눈 속에서 마주친 것인지 흩어진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지석 씨?"
정수는 초점 없는 흐릿한 눈을 하고도, 눈앞의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의 속눈썹에 눈송이가 내려앉아 녹아내렸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얇은 옷차림이었다. 미뤄두었던 걱정이 둑이 터지듯 밀려 나왔다. 짧은 숨이, 하얗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한 박자 늦게 목구멍에서 말이 뱉어졌다.
"피가 나잖아요. 씨발, 로봇이 피를 흘리는 게 어디 있어."
"…꿈인가. 저, 로봇이지만 꿈도 꾸거든요."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차려요. 제발."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정수를 감쌌다. 자신에게는 길게 내려오던 코트가 그에게는 무릎에서 달랑거렸다. 이유도 모른 채 손이 덜덜 떨렸으나 피가 나는 그의 머리를 꾹 눌러 지혈했다. 얼어 죽는 게 이상하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피는 따뜻했다. 그 붉은 액체가 손바닥 안을 물들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로봇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명백한 생명이었다. 고장 나도 부품만 있다면 어떻게든 고쳐낼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 한번 망가지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지석씨, 저는… 고장 났어요. 수거팀이 올 거예요. 불량품이라서…."
정수는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모를 떨림 속에서 지석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니, 당신은 고장 난 게 아니야. 그냥 다친 거야."
정수를 반쯤 지탱하다시피 하며 앞으로 걸었다. 정수는 제게 기댄 채 겨우 걷는 듯 보였다. 자신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분명 이 눈밭 어딘가에 엎어져 눈이 다 그쳐 녹을 때까지 그 자리에 쓰러져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로봇이라고, 그러니 다시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그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 준이 보낸 파일을 열어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의뢰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아니다. 그가 인간이라고 생각됐던 그때…, 그때 더 빨리 손을 잡았어야 했다. 그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면 김정수는 여전히 초점 흐릿한 눈으로 앞을 보고 있다. 자신이 그를 보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묻는다.
"지석씨 저는…, 아무 쓸모도 없는데. 왜 도와주시나요?"
"…"
"역시 꿈인가 봐요."
답을 하지 못하자, 정수가 미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체념한 듯한 웃음이 싫었다.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 마냥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을 돌렸다.
"내 가게로 가요."
"수리 문의는…… 안 받으신다면서요."
"수리하러 가는 거 아닙니다. 그냥, 눈 피하러 가는 거예요."
그 말에 정수는 무언가 덧붙이려다,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질문에 에너지를 쓰는 것이 더 비효율적인 일인 것을 그도 아는 탓일 것이다. 그저 몸을 가까이 붙인 채 최선을 다해 걸었다. 눈 위에 찍히는 발자국 두 쌍은 찍히기가 무섭게 새로운 눈으로 덮여 사라졌다.
수리점은 셔터를 굳게 내려놓은 채였다. 가게 출입문 대신 지하로 곧바로 통하는 뒷문을 열어 정수를 지하 창고로 데려갔다. 로봇이 아닌 살아있는 것을 그곳에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잘 쓰지 않아 불이 나간 어두운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졌다. 그 긴 계단을 내려가 지하의 문을 열면 오래된 종이와 건조한 금속 냄새가 나는 공간이 정수를 맞이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를 빠르게 매트리스에 눕혔다. 정수는 긴장이 풀린 듯 눈을 감고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구석에 처박아 놓고 쓴 적 없던 난로를 끌어와 켰다. 오랫동안 켜지 않았던 탓인지 먼지 냄새가 났으나 다른 수가 없었다. 온도를 최대치로 높여놓고는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
수리가 아닌 치료. 고장 난 기계가 아닌 상처 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서툰 손길로, 살아 숨 쉬는 존재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약한 것은 언제나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게 참 싫었다. 사랑하는 모든 것이 영원불멸한 채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기계를 고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그것의 상처를 먼저 마주해서였던 것 같다.
지하의 찬 공기가 느릿하게 데워지기 시작했지만, 침대 위에 웅크린 정수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마부터 턱끝까지 흘러내려 붉게 물든 피를 물 묻은 수건으로 닦아내면 추위에 허옇게 질린 피부가 드러났다. 붉은 피에서는 쇠 냄새가 났다. 그러나 녹슬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거즈를 뭉텅이째로 상처 부위에 세게 눌러냈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작게 새었다. 고통 같은 건 느끼지 않는다는 바보 같은 소리가 생각나 한숨을 쉬었다. 지석은 손가락으로 워치를 가볍게 두 번 터치하고는 질문했다. 상처 부위는 어떻게 봉합하지? 몇 초의 기다림이 지나지 않아 워치에서 기계음이 흘렀다.
의료용 스테이플러를 사용하거나 의료용 피부 접착제를 사용합니다.
지석은 그 말을 듣자마자 로봇 수리를 위해 약품을 모아놓은 박스를 뒤졌다. 인간과 비슷한 피부를 가진 로봇을 위해 쓰였던 피부 접착제가 있었다. 완전히 의료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대로 계속 피를 흘리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적어도 일반적인 순간접착제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어느 정도 지혈이 된 상처 위로 알코올 솜을 문질렀다. 정수의 얼굴이 예민하게 찡그려지는 게 눈에 띄었다. 못내 그 눈가를 손가락 끝으로 살짝 문지르면 이내 풀어지는 인상. 잠시 그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가, 그의 머리 쪽 피부를 알맞게 당겨 맞춘 뒤 피부 접착제를 도포했다. 작업 자체는 매일 같이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릴 적 몰래 로봇을 수리하던 어떤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지석아, 너는 완벽해야 해.’
부모님이 제 어깨를 꽉 붙잡고 말하던 목소리와 기대 어린 눈빛을 선명히 기억한다. 학교에 가자마자 한 아이큐 검사와 그에 뒤따라 붙은 영재라는 타이틀은 그 기대를 부채질하기에 알맞았다. 담임 선생님은 꽤나 들뜬 목소리로 말했던가. 지석이는 정말 뭐든 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은 분명 나를 위해 뱉은 것이었겠지만, 가난한 부모에게는 어쩌면 자신들을 위한 마지막 희망처럼 들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지석이는 커서 뉴럴 네트워크 아키텍트가 될 거니까. 그렇지?'
그때에는 알아들을 수 없던 이름조차 길고 어려운 그것은, 정신 회로 속에서 영원히 사는 신인류의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 예견되는 새로운 직업이었으며, 동시에 지식과 기술만 있다면 개인으로도 기업만큼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놀이, 오늘의 컴퓨터 게임, 선생님에게 받는 칭찬, 혹은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언제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구형 클로토. 그냥 그런 것들이 좋은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그런 어린 나를 보며 부모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내가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벌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싼값에 주워 와 집 안의 모든 잡일을 도맡고 있는 구형 클로토였다.
평소보다 시험을 잘 보지 못한 날이면 온몸에 긴장이 바짝 들었다. 혼나는 게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라는 것이 더 싫었다. 미안하고, 속상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토는 부모가 휘두르는 골프채를 맞아 몸체가 푹푹 찌그러졌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쳐 나는 충돌음은 언제나 공포스러웠다. 부모는 고작 로봇에게 자비를 가지지 않았다. 네가 틀린 문제 수만큼 이 로봇을 때릴 뿐이야. 이건 네 잘못이잖니. 지석아, 네가 제대로 했어야지. 너는 그럴 수 있는 아이잖니. 그들은 그것이 언제나 나의 탓이라고 말했다. 그 앞에선 언제나 무력했다. 부서지는 로봇 앞에서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울었다. 차마 반항하지는 못했다. 자신도 그것처럼, 그러나 고칠 수도 없게 부서져 내릴까 봐 무서웠다. 그러니 무언가를 지키는 방법에는 완벽해지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주제에 밤마다 몰래 로봇을 수리한 건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일이었다. 나를 대신하여 깨져버린 로봇의 외피를 펴고, 찌그러진 프레임을 맞추고, 벗겨진 배선을 다시 잇는 일.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도련님, 괜찮습니다. 저는 아프지 않습니다."
클로토는 맞을 때는 꼭 인간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었지만, 수리받을 때는 자신을 위로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것조차 프로그래밍의 일부였을까? 아무래도 좋다. 기계는 어느 정도 부서져도 메인 부품만 남아있으면,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아무리 망가져도 자신이 고칠 수만 있다면.
"미안해. 내가 다 고쳐줄게. 내가 최고의 수리공이 돼서, 너 평생 안 죽게 해 줄게."
어린 마음에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면 그것은 덜 펴진 얼굴을 하고 찡그리듯 웃었다. 저는 도련님을 믿어요. 그 얼굴을 영원히 기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내가 더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수리공을 꿈꿨다. 죄책감과 참회, 인간에 대한 혐오와 기계에 대한 애착, 사랑과 불신, 영원이라는 지킬 수 없는 약속. 그런 것들을 전부 그때 배웠다.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딱 한 번만 돌아가 보고 싶은 나의 지난한 어린 날.
그러나 잃어버리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의대가 아닌 공대, 그것도 로봇 수리를 선택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날, 부모는 그 약속을 영원히 부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클로토는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믿고 싶지 않아 온 집 안을 뒤졌으나, 오로지 자신이 수리를 위해 숨겨두었던 부품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의 동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완전한 폐기 처분이었다. 그야 클로토의 주인은 부모였으니 나의 동의 따위가 필요치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아끼고 사랑한 것은 오로지 나였다. 어째서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느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무것도. 이 세상에 나의 편은 없었다. 펴지 못해 결국 교체했던 로봇의 찌그러진 외피만이 나에게 남은 것이었다.
오로지 부재만이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윽."
정수의 낮은 신음에 지석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눈을 반쯤 뜬 그와 시선이 마주쳤으나 별다른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상처 부위에 정방형으로 잘린 두꺼운 흰색 거즈를 종이테이프로 눌러 붙였다. 머리에 붕대까지 둘둘 감아대는 건 너무 과한 처사일 것 같아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이나 정리해 주었다. 한숨을 내쉬며 말을 뱉었다.
"웃옷 좀 벗어봐요. 다른 데도 봐야 하니까."
안 그래도 그의 베이지색 니트는 그 위에 떨어진 핏방울이 털실에 엉켜 검붉은색으로 말라 굳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입힐만한 옷이 있는지를 잠시 고민하는 동안, 그는 말없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꼭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양새였으므로 굳이 옷을 벗으라는 재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수는 무언가 결심한 듯, 느리게 니트를 벗어냈다. 그러나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그의 등이 드러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그를 가까이 보면 볼수록,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혔다.
고작해야 몸싸움이나 눈밭을 굴러 생긴 타박상 정도를 생각했다. 약이나 발라주고 더 재울 심산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날개뼈 부근의 깊은 흉터가 척추를 따라 기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무 지식 없는 사람이 보아도 한 번에 생긴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알 법 했다. 수없이 째고, 꿰매어진 듯 엉겨 붙은 살의 흔적. 그리고 왼쪽 날개뼈의 피부 아래에 네모난 금속의 윤곽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그 위로 손을 대려다가, 손끝을 손바닥 안으로 말아쥐었다. 만지는 것조차 실례일까 봐 겁이 났다. 덜덜 떨리는 제 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
"…누가 이랬어요?"
제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낮게 들렸다. 정수는 꼭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게 대답했다.
"업그레이드… 과정이었어요. 꼭 필요한 일이라고 모두가 그랬어요. 안드로이드가 메인 칩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아빠가 칩을… 깊숙이 넣어주셨어요."
"…혹시 제가, 만져봐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요청에, 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며 허공에서 머물던 손이 겨우 정수의 등 뒤, 흉터 위로 조심스럽게 닿았다. 손바닥을 쫙 펴 그의 날개뼈 위에 올려붙였다. 얇은 피부 아래로 딱딱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너머로 작게 쿵쿵 뛰는 진동이 전해졌다. 기계의 모터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심장박동이다. 규칙적인 듯하지만, 절대로 규칙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은.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제 심장 소리도 따라서 쿵쿵쿵 뛰었다.
"이건 업그레이드가 아니에요."
겨우 소리내어 말했다. 정수가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흉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의 심장 소리를 내가 듣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인간이라고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김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몸을 웅크렸다. 그가 몸을 동그랗게 말면 칩셋의 위치는 더 명확하게 손안에서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정수는 부정하듯, 다시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거렸으나, 정적이 흐르는 지하창고에서 그의 목소리는 명확했다.
"아니에요, 저는…… 저는 클로토니까……."
"당신 말대로 클로토는 아픔을 못 느껴요. 근데 당신, 지금 아프잖아."
그가 몸을 더 작게 웅크렸다. 조금만 더 사실을 뱉었다가는 조그만 공벌레가 되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에 대해 물으면 또 안구 부품의 문제나 기계적 오류라는 바보 같은 말을 할 게 뻔했다. 거짓말쟁이. 아니, 타인을 위해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바보같이 착한 사람. 이상하게도 그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게 느껴졌다. 자신보다 한 뼘은 큰 사람인데도 끌어안으면 품 안에 쏙 들어올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대신 그의 어깨 위로 이불을 둘둘 둘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온기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여기 있어요. 이월이 끝날 때까지."
그는 대답이 없었다.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대신 일어나 불을 끄고,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구형 라디오를 켰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사이로 느린 재즈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정수를 두고 자신의 작은 방으로 들어서면, 그제야 밖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음악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지석은 자신의 방문에 기대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귓가에서 심장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문밖의 그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으나, 눈을 뜬 건 새벽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결국 잠을 깨웠다. 어딘가 불편한 것처럼 끙끙거리는, 앓는 소리. 손목의 워치를 확인하면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다시 눈을 감고 싶었으나 잠들기에는 너무 말짱한 정신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문을 열었다. 난로가 돌아가는 창고는 평소처럼 차가운 공기가 아니라 미적지근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근처로 다가가면 앓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작업 테이블 옆에 놓인 주황색 불빛의 간접 등을 켰다. 간이 매트리스에 몸을 구긴 김정수의 실루엣이 창고 벽 위로 비쳤다.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였으나 소리는 어떻게 해도 다 가려지지 않았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이불 속에 몸을 돌돌 말고 잔뜩 웅크린 남자의 머리카락이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손을 그의 이마와 베개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 손에 느껴지는 고열이었다. 그렇게 얇은 옷 위에 눈 쌓인 거리를 돌아다닐 때부터 예상해야 했다.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얼음주머니라도 만들어 온 뒤 약을 먹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손목이 옅게 붙잡혔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울먹임 같은 것에 섞여 조그맣게 들렸다.
"…죄송해요."
"뭐가요?"
"아프면 안 되는데… 아니, 저 안 아파요. 문 잠그지 마세요. 기계는, 열이 나면 멈추는데."
되물은 말에 횡설수설하는 정신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웅크린 매트리스 곁에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위로하는 법을 배운 적 없으므로, 그의 말을 정정하는 대신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정수가 베개에 묻고 있던 얼굴을, 눈만 빼꼼 드러내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동그란 눈동자. 그 뾰족한 눈매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동그랗고 어두운 눈동자에 주황색 조명이 어른거렸다. 이제 그 눈동자는 슬프기보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다시 눈동자를 숨겼다.
"…지석씨."
그가 낮고 조용하게,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슬픔인 것처럼 먹먹하게 제 이름을 불렀다. 잠시의 침묵 뒤에 대답했다.
"네."
"저, …살고 싶어요."
간결한 대답 뒤에, 붙는 말이 무겁다. 그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말한다. 너무너무 살고 싶었어요. 정말 딱 한 번이라도 살아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죽고 싶었어요. 두서없는 말이 툭툭 터져 쏟아진다. 그의 삶을 예측할 수도, 재단할 수도 없다. 이미 지나간 것은 바꿀 수도, 수리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내일은 눈이 그칠 겁니다. 그러면 샌드위치라도 사 올게요. 가공육 말고, 진짜 고기가 들어간 거로."
목소리는 낮고 단단하게 뱉어졌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겹쳐 얽어 쥐었다. 기계라면 결코 내보내지 않았을 비효율적인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정수는 그저 베갯잇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아주 느려서, 계속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았다. 정수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제 손을 뒤늦게 힘주어 쥐었다. 베개 너머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고기… 들어간 거요?"
"그래요. 야채도 많이 넣고, 소스도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저 무슨 소스 좋아하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내일 물어보겠다는 소립니다. 그러려면 잠이나 자요. 열 떨어지게."
내일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 점은 꼭 영원이라는 약속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을 믿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밖에는 아직 눈이 내릴까. 창문이라고는 없는 지하창고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창고 안의 공기는 여전히 미적지근하고, 원하든 원치 않든 지구는 같은 속도로 자전하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울먹임도, 숨소리도 잦아들고 난 후에야 뒤늦게 조용히 중얼거린다.
"잘 자요, 정수씨"
지하로 해가 들지 않아도 어김없이 아침은 온다. 정수의 옆에서 새벽을 뜬 눈으로 보내다 겨우 든 잠을 깨운 것은 준의 음성메시지였다. 열두 시쯤 수리가 끝난 물건을 가지러 오겠다는 연락이었다. 시간을 흘끔 확인하니 세 시간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지석은 텍스트로 회신하는 대신 전화를 걸려다, 잠든 정수를 흘끔 보았다.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무문을 나서 복도에 선 뒤에야 워치를 두 번 터치해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한 번 채 다 울리기도 전에 그의 쾌활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옙, 준입니다."
"올 때, 샌드위치 좀 사다 줘. 2개."
언제나처럼 별다른 인사 없이 용건을 던졌다. 준 역시 익숙하게 대답하려다가,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웬일로 샌드위치를 두 개나?"
"가공육 말고 소고기로."
"얼씨구. 진짜 이상하네 이 형. 혹시 하나는 제 거예요?"
그가 장난기 어린 질문을 던졌다. 그저 평소의 준이었다. 그렇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투는 아니었음에도 대답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괜히 더 딱딱하게 대답했다.
" 내가 다 먹을 거야."
"그래서 용건은 그게 다예요?"
그가 알았다는 듯이 묻는데, 어제의 짧은 대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태 맛있는 것에는 특별히 흥미가 없었고, 밖에서 자는 사람을 깨워 굳이 소스에 대해 묻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질문을 주저했으나, 목소리가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
"… 소스, 인기 있는 걸로 추천해달라고 해줘."
잠시의 정적 뒤에 푸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준이 그렇게 커다랗게 웃는 걸 들은 건 아주 오랜만이어서 귀가 새빨갛게 익어버릴 것 같았다.
"인기 있는 소스라니, 형 입에서 그런 소리가 다 나오네. 알았어요, 알았어. 소고기 듬뿍 넣고, 요즘 잘 나가는 매콤달콤한 소스로 알아서 사 갈게요. 근데 하나는 내 거 맞죠?"
"내가 다 먹는다고 했다. 끊어."
지석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손목 워치의 화면이 꺼졌지만, 귓가에 남은 열기까지는 꺼지지 않았다. '인기 있는 소스'라니. 뱉어놓고도 스스로가 낯간지러웠다. 이상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다시 지하 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웅크려 누운 김정수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제의 고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르게 오르내리는 그의 어깨를 보니 가슴 밑바닥이 아주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굳이 깨우지 않았다. 책상 위에 쪽지 한 장을 달랑 남기고는, 그를 두고 일 층으로 향하는 문을 도로 나섰다. 쪽지에는 지석의 필체로 딱딱한 문장이 남아있다. 일하고 있으니 올라오지 마시오.
오픈 시간에 맞춰 가게의 셔터를 올리고 준이 가져가야 할 로봇을 정성 들여 포장했다. 에어캡과 박스테이프로 꽁꽁 둘러져 박스 안에 들어간 로봇은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제 역할을 다할 것이다. 로봇의 의무는 인간의 필요로 결정된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정말로 로봇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해 줄 뿐인 것은 아닌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로봇을 만지고, 고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일.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그런 상념에 점점 깊이 잠겨가고 있을 때, 지하에서 통하는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면 지하에서 올라온 정수가 부은 눈과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제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지석씨."
"제가 남긴 쪽지 못 봤어요?"
"아,… 못 봤어요."
놀란 가슴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딱딱하게 말했으나, 전혀 모르겠다는 맹한 정수의 얼굴에 오히려 작게 한숨과 웃음이 섞였다. 어쨌거나 김정수에게는 강제 수거 조치가 내려져 있으니 조심해야만 했다. 그게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필요했다. 이렇게까지 조심성 없는 사람이라니, 불법 수리점을 찾아가는 걸로 알아봐야 했는데. 준이 들이닥치기 전에 지하로 돌아가 있으라고 이야기하려던 찰나, 출입문이 열리는 가벼운 종소리가 딸랑거렸다. 놀라 급하게 정수를 카운터 아래로 밀어 넣듯 구겼다. 정수는 영문도 모른 채 몸을 구겨 카운터 아래에 숨었다. 그의 덩치 덕분에 목이 살짝 꺾인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 준은 언제나처럼 같은 검은 헬멧을 쓰고 있었고, 덕분에 정수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준은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 포장된 샌드위치 두 개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이며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준에게 들키면, 어떤 경로로든 김정수는 신고당할 것이 뻔했다. 카운터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기대 정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다. 긴장한 채 준을 맞이했다.
"형, 여기요. 소고기 듬뿍에 매콤달콤 소스. 요즘 이게 제일 잘 나간대요."
준이 봉지를 건네며 헬멧 앞 유리를 살짝 올렸다. 그의 눈은 장난기 가득한 채, 자신을 놀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 분명 두 번째 샌드위치가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을 다시 하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 그에게서 최대한 무표정하게 봉지를 받아서 들었다. 봉지 안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으나 그대로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고맙다는 말 대신 준에게 수리가 끝나 잘 포장된 물건을 건넸다. 의외로 준은 예상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대신 포장된 상자 위에 주소지가 적힌 홀로그램 스티커를 능숙하게 붙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형, 그거 봤어요?"
"뭐?"
준이 자신의 패드를 꺼내 지석에게 보였다. 화면에는 ‘클로토를 찾습니다’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적힌 전단이 떠 있었다. 지석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전단지 속의 사진은 지금보다 어린 낯의, 미지근하게 웃고 있는 김정수였다.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일련번호는, 너무도 익숙했다. C-000626.
"가족들이 찾고 있대요. 보상금도 꽤 되던데."
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신이 난 듯 들렸다. 보상금 때문일 것이 틀림없었다. 애써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며 화면을 흘끗 보았다.
"그래서?"
"에이, 형도 관심 좀 가져봐요. 어차피 이월이면 꺼질 클로토를 이렇게 보상금까지 걸면서 찾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이제 몇 주 남지도 않았는데."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냥 장난만 치는 애 같다가, 가끔은 돈에 환장한 놈 같다가, 이럴 때는 또 반짝거리는 그의 눈이 무섭다. 속을 알 수가 없는 놈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에게 김정수를 들키는 일은 없어야 했다. 불안감에 괜히 마른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뜯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준이 다시 묻는다.
"혹시 형 가게 근처에서 본 적 없어요?"
"없어."
단호하고 딱딱한 대답에 준이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잠시 생각하는 듯 멈추었다가, 그가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형, 근데 그때 그 클로토가 C-000626 아니에요?"
"몰라 관심 없어."
"에이, 결제했더만."
"내가 찾던 게 아니더라고."
준이 말없이 지석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진짜인지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혹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눈에는 의심이 담겨있었고, 한번 시작한 거짓말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걸 알고 있다. 더 변명하려는 찰나, 순간 꼬르륵 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정적. 그러나 서있던 준이 와르르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지석이 자신도 모르게 곁눈질로 카운터 아래를 본다. 자신도 놀라 동그래진 눈을 한 김정수가 거기에 있다. 얼굴이 새빨간 채다. 준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말한다.
"아, 형 진짜 배고팠구나. 얼른 먹어요."
지석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비닐봉지 안의 샌드위치 두 개를 주섬주섬 꺼냈다. 준은 물건을 다시 확인하고 옆구리에 끼워 들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뭐, 어쨌든 형이 잘 알아서 했겠죠. 그럼, 저 가볼게요. 배달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준이 가게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딸랑이는 종소리가 멎은 후에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수도 엉거주춤 카운터 아래에서 기어 나와 제 눈치를 보았다. 그가 우물거리며 사과의 말을 뱉었다.
"…죄송해요, 저도 이런 일이 생길지 몰랐어요."
정수의 얼굴은 아직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준이 나간 출입문을 한 번 흘끗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해결이 되었으니 좋은 일일까. 준이 이렇게 쉽게 의심을 거두는 사람이었던가. 찝찝한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거나 식사를 미루어서는 안 됐다. 샌드위치 두 개를 집어 들고는 정수의 등을 살짝 밀었다.
"우리 내려가서 점심 먹어요."
정수가 앞장서 지하로 내려갔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지하 창고는 이제 온기가 제법 따듯하게 돌고 있었다. 작은 상을 하나 펴고, 간이 매트리스에 나란히 걸터앉아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찢었다. 이미 빵은 좀 식었지만, 여전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정수의 몫의 샌드위치를 그의 손에 쥐여주고는 빤히 바라보았다. 정수는 샌드위치와 나를 어색한 눈동자로 번갈아 바라보다가 꼭 변명하듯이 말했다.
"근데, 저, 그냥 영양 캡슐이면 되는데…"
"아까 배에서 꼬르륵거린 게 누군데요."
그 말에 그는 입을 꾹 닫고 눈을 깜박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한 입 작게 깨물었다. 부드러운 빵과 아삭한 채소, 잘 익은 소고기, 매콤달콤한 소스가 입안에서 조화롭게 섞였다. 입을 우물거릴 때마다 정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곧, 굳이 시키지 않아도 계속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삼켰다. 조금씩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동그란 볼을 빤히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요."
"……맛있어요. 진짜로요."
그가 입가에 소스를 입에 묻힌 채 중얼거렸다. 그는 어딘가 감격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 얼굴이 귀여웠다. 귀엽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고는 정수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손끝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맛있게 먹어요.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고는 곧 제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말 그대로 매콤달콤한 소스였다. 먹는 걸 좋아하느냐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정수의 말처럼 자신도 영양 캡슐이나 하나 삼키는 쪽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왜, 오늘의 샌드위치는 나쁘지 않을까. 음악조차 없이 씹는 소리만 아삭아삭 들리는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둘이 각자 몫의 샌드위치를 금방 해치웠다. 물티슈에 손을 닦고 테이블을 접다가, 정수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질문했다. 내일도, 모레도 그 모레의 내일에도 그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저녁에는 뭐 먹을래요?"
지석의 말로 시작된, 지하 창고에서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날들이 이어졌다. 바깥 공기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만 빼고는 나름대로 평범한 날이라고 우겨 볼 수 있겠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하고, 때맞춰 밤 인사를 하고 잠들었다. 그는 자기 방에서, 나는 그가 내준 간이 매트리스에서.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 날짜가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을 매일 속으로 세었다. 이월까지 딱 손가락을 열 개를 한 만큼의 날짜가 남았을 때, 나는 그의 말대로 정말 인간일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그럼에도 여전히 죽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등에 박힌 칩을 제대로 만질 수는 없었다. 나는 무엇일까. 정말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석이 오랫동안 지상으로 올라가 있을 때면 더더욱 그런 생각들이 나를 좀먹었다. 내가 꺼져버린다면 누가 슬퍼할까. 엄마가? 아빠가? 아니면 지석이 나를 위해 울어줄까? 그런 과한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이는 게 도움이 됐다. 나는 설거지를 하거나, 이불을 빠는 일에 의외의 재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하 창고를 청소하기로 결심했다. 방을 더 환하게 밝히면 보이는 먼지들과, 알 수 없이 어지럽게 놓인 박스들이 그 결심을 굳히게 했다. 지석에게는 여태까지 돌봐준 보답을 하고 싶기도 했으므로, 청소를 깜짝선물 삼기로 했다. 일부러 지석이 출장 수리에 걸린 날을 골랐다. 지석은 혼자서라도 꼭 점심을 챙겨 먹으라는 당부를 남겼고, 나는 나의 계획을 생각하며 그냥 웃었다.
아무렇게나 쌓인 지석의 먼지 앉은 상자들. 어느 것을 먼저 열어보아야 할지도 몰라 멈칫대다가, 가장 눈에 띄는 아주 오래된 종이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는 생각보다 가벼웠고, 그걸 여는 건 아주 쉬웠다. 그 안에는 누가 봐도 오래되고 망가진 부품이 들어있었다. 찌그러지고 녹이 슨 고철 외피. 버려 마땅한 것을 자신도 모르게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왜 이런 쓸모없는 것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을까. 잠시 말없이 그 망가진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언젠가는 그것도 움직이는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고개를 들어 이 공간의 모든 박스를 한번 훑어보았다. 이제야 이곳이, 수많은 로봇의 무덤처럼 느껴졌다. 문득 생각했다.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끌어안고 살아왔구나. 그러니 정리해야 하는구나. 이 모든 것들을.
실상 정리는 어렵지 않았다. 나는 지석이 아니고, 그렇기에 그것들에 뒤로 따르는 감정이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건 무언가를 정리하는데에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아예 망가져 쓸 수 없는 것을 한쪽에 모으고, 아직 쓸 수 있는 것들을 그 자리에 남겼다. 쓸 수 있는 부품이 담긴 상자에는 이름을 적었고, 오래되고 빈 상자들은 구겨 접었으며, 망가진 부품들은 한데 모아 비닐봉지 안에 담았다. 쌓인 먼지를 털고 걸레로 선반과 바닥을 박박 닦았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그것들이 새것이 되지는 않는다. 오래된 자리에는 바랜 흔적이 남기도 하고, 은은하게 곰팡이가 슨 벽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떤 것은 털어내고 나아가야 하고, 본능은 그걸 아주 잘 알았다. 마지막으로 바닥을 쓸고 닦았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 지석이었다.
"뭐한 거예요?"
문이 열리자마자 툭 튀어나온 그의 목소리가 낮고 차가웠다. 차마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지 못하고 쥐고 있는 걸레를 손으로 꾹 쥐었다.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괜히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잘 갔다 왔어요? 제가 청소를, 좀, 했어요."
"제가 언제 그런 걸 시켰어요?"
지석의 발걸음이 쓸 수 없는 부품을 모은 비닐봉지로 향했다. 아무리 그라도, 더 이상 그게 어디의 무슨 조각인지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낮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고철들이 가득 든 비닐봉지 앞에 쪼그려 앉은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석의 손이 망가진 부품들을 조심스레 뒤적거리고 있었으나, 사과도 변명도 튀어나오질 않았다. 아니, 언젠가는 그래야 하는 일을 조금 앞으로 당겨온 것일 뿐이었다. 당신이 그것들을 끌어안고 있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 내가 그럴 주제가 되나? 뒤늦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술을 꾹 깨물고 눈동자를 굴렸다.
"왜 그랬어요?"
"…"
"왜 그랬냐고 묻잖아!"
그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악을 쓰듯 소리 질렀다. 겁이 났다. 제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자신을 돌아보는 그 검은색 눈동자는, 감정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그 감정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낡은 부품들과 작별한다는 게 그렇게 아프고 슬픈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장례도 치르지 못할 고작 고철 조각들조차 버리지 못 했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너무 주제넘은 물음이다. 조용히 대답했다.
"…미안해요. 근데, 나는 지석 씨가 무덤 같은 곳에서 사는 게 싫었어요."
시선이 애매하게 엇갈렸다. 지석의 무너지는 표정을 처음 보아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대답 대신 비닐봉지를 끌어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커다랗게 들렸다. 정적만이 깨끗해진 지하실 안에 가득 찼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지석이 돌아오며 사 온 간식거리만 지하실 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화해하고 싶었으므로 지하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요리를 했다. 그가 하던 것처럼 찬장에서 참치 통조림을 찾아 따고, 진공식 쌀밥을 돌린 뒤, 곁눈질로 보기만 했던 달걀프라이를 두 개 부쳤다. 아니, 사실 다섯 개쯤 부쳐, 태우지 않은 것을 그의 몫으로 골랐다. 모양은 엉망이었지만 먹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사과를 받아주리라고, 그리고 그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석은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어도 그 문은 꿈쩍도 없이 닫혀있었다. 꼭 셔터를 올리는 일조차 잊은 것처럼 굴었다. 그가 그 방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목을 죄듯 스물스물 올라왔다. 그에게 너무 많이 참견해버린 게 틀림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그에게 내보였다는 이유로, 그 역시 모든 것을 알려줄 것으로 생각한 죄일 것이다. 결국 그도, 원하는 모습의 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무도 먹지 않아 식어버린,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달걀프라이를 내려다보며 속이 시린 기분이 들었다. 지석의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아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지석씨 …."
늘어지듯 뱉은 말이 문 너머로 과연 닿았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귀를 막고 있거나 아주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등을 문에 붙여 앉은 채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웠다. 횡설수설한 말들이 아무렇게나 물밀듯이 쏟아졌다.
"미안해요. 감히 제가 너무 많이 참견한 거겠죠. 저는 당신한테 그럴만한 존재가 아닌데, 괜한 짓을 했나 봐요. 근데 저는 있잖아요. 그걸 치우고 정리하면서 계속 지석씨 생각했어요. 지석씨가 여태 모아온 그것들이 지석씨가 사랑한 것들이라면, 그들도 지석씨를 좀 먹고 싶지 않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런 가늠을 하는 게 오만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지석씨한테 제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도…, 샌드위치를 같이 먹는 순간들만큼은 제가 지석씨한테 뭐라도 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그랬어요. 지석씨가 저를 바꿔주고 싶어 한 만큼, 저도 지석씨를 … "
길어지는 말 중간에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에 기대앉아 있던 탓에 등이 뒤로 기울어, 바닥에 드러누울 뻔한 꼴이 되었다. 열린 문 사이로 튀어나온 지석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지석은 여전히 웃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울고 싶었다. 몇 끼를 굶은 채 방에 박혀있던 지석은 평소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그의 눈썹뼈 아래로 깔린 그늘이 짙었다. 어쩌면, 그가 여전히 화가 나 있다면,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아니면 본사로 가 폐기당할 수도 있겠다. 안드로이드의 쓸모를 다하러 돌아간다는 간단한 사실이 이토록 서러운 말인 적이 없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울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석이 조그맣게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 너무 많이 참견한 거죠. 여태껏 저한테 그런 사람은 없었거든요."
"…"
"근데, 정수씨 말이 맞아요."
지석이 그 말을 뱉는 순간, 든 줄도 몰랐던 긴장이 풀렸다. 그가 무슨 말을 이을지도 모르면서 옅은 숨이 코끝으로 새어 나갔다. 고작 그 찰나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다음 이어갈 말을 우물거리던 찰나였다. 창고의 책상 구석에 놓인 지석의 모니터가 노란색 경고 표시를 반짝였다. 지석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건물 밖의 CCTV가 작동한 모양이었다. 지석이 정수를 지나쳐 화면 앞에서 경고 표시를 클릭했다. 모니터에는 지석의 수리점을 굳게 닫고 있는 철제 셔터를 두드리는 어떤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어떤 남자? 아니, 단순히 ‘어떤’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아버지다. 아버지가 여기까지 나를 찾으러 왔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것이 틀림없다. 몸이 덜덜 떨렸다. 며칠이나 집을 비우고 엄마를 혼자 두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분명 혼날 것이다. 아니면 칩을 더 깊이 박아 넣을지도 모른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어쩌면 지석이, 문 뒤에서 나를 돌려보내기 위해 벌인 일일지도 모른다. 지석이 그제서야 자신에게 다가와 눈을 맞추려는 게 느껴졌다.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석씨, 저…. 집에 안 갈래요. 그냥, 여기에 있게 해주세요. 나 여기서 고장 날래요. 네? 제발요."
수리점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간혹 있다. 어떤 일이든 진상이 없는 쪽이 더 드문 것 아닌가. 노란 경고등이 눈이 아프게 점멸하는 CCTV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화면 속에 존재하는 남자는 분명 어떠한 악의를 가지고 철제 셔터를 두드리고 있는 듯 보였다. 만약 악의가 아니라면 기계 수리가 너무 급한 어떤 선량한 시민일 수도 있겠으나,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물론 어느 쪽이든 해결하면 그만일 일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뒤를 돌았을 때 김정수가 완전히 무너져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안드로이드’라는 가면을 쓴 채 무덤덤하게 굴던 그가 겁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떠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혀 그를 내려보다가, 그의 앞에 꿇어앉아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곧 울 것 같은 얼굴. 자신을 보내지 말라고 비는 그의 목소리. 그런 것들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속이 쓰렸다. 그를 품 안에 꽉 끌어안아도 제 작은 품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김정수는 분명 자신보다 너무 컸는데, 반대로 이상할 정도로 작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제 방문을 열어 정수를 그 안에 눕혔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속삭였다.
"제가 나가서 해결하고 금방 올게요. 그때까지 여기 있어요."
붙잡는 김정수의 손이 차가웠다. 그의 손을 한 번 꾹 쥐었다가 놓았다. 그의 옆에 언제든 상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패드를 통해 워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연결해 두었다. 여전히 울먹거리는 그를 괜찮을 거라고 달랬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지상은 여전히 무채색이다. 아직 다 녹지 않은 흰 눈, 혹은 밟히거나 뭉개져 더러운 색이 된 눈이었던 것들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그리고 수리점 앞에는 아까 화면 속에서 얼핏 본 남자가 여전히 셔터를 쾅쾅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고 서 있다. 악의적인 행동과는 별개로 그의 차림은 멀쑥하다.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코트를 차려입었고, 검은색 구두까지 신었다. 지석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지금 남의 가게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날 선 목소리에 남자가 이내 자신을 돌아본다. 그의 낯은 어딘가 익숙하다. 정확히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앞의 남자가 이내 미지근하게 웃어 보여서 그 낯이 김정수와 닮았음을 너무나 쉽게 깨닫고 만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그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투의 부드럽지만, 강압적인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저희 아이가 여기에 있지요?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례금이 필요하다면 드리겠습니다."
"아뇨, 가게에는 저밖에 없습니다. 돌아가시죠."
"거짓말하셔도 다 알고 왔습니다. 다들 정보상을 쓰지 않습니까. 그 메인 칩은 저희에게 소중한 것이어서요."
남자의 말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의심이 담겨있던 준의 눈동자가 떠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하고 묘한 정적 속에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옛날얘기 좋아하십니까?"
"…예?"
지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으나,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꼭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도 자신의 물건을 돌려줄 것인 듯한 태도였다.
"그냥 옛날얘기입니다. 제 아내는 클로토를 개발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거든요."
그 말에도 꿈적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다 듣고 나면 오히려, 그를 더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남자는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원래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습니다. 랜덤한 유전자 조합의 결과물을 사랑이라고 믿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 아닙니까. 제 아내 역시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열망 같은 건 조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생에 아이라는 구속이 생기고 영향받는 게 더 싫다고 말할 정도였죠. 그래서 저희는 저희의 취향에 완벽하게 알맞은 클로토 아이를 만들었습니다. 초기 클로토는 인간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 알고 계시죠? 유사할 뿐만 아니라 로봇의 기능까지 아주 성실하고 완벽하게 해냈답니다. 제 아내는 자신이 만든 그 작품을 아주 자랑스러워하며 이름 붙였죠, 김정수라고요."
"…. 하지만 정수씨는 로봇이 아니잖아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가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가 제 행동을 보고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이내 예의를 차리는 체를 했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맞아요, 수리공 씨. 물론 지금 당신이 데리고 있는 그 애는 완벽한 로봇이 아니죠. 정말 쓸모라고는 하나뿐이죠."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정말이지 하나도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 눈에 그대로 띄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계획하고 완벽하려 해도 우연이 생기더군요. 예기치 못하게 생긴 아이입니다. 아내는 절망했으나 임신을 너무 늦게 알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낳았죠. 그렇다고 아내가 그 아이에게 정을 붙이지는 못했습니다. 진짜 아이는 클로토에 비해 너무 뒤떨어지는 존재잖아요."
"…."
"그래요, 일이 터진 건 다 그 아이 때문이었습니다. 클로토와 아이가 함께 외출한 그날, 교통사고가 났거든요. 클로토는 아이를 구하려다 메인 칩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겨우 타박상을 입어 우는 아이 앞에서 아내는 산산조각 난 클로토의 잔해를 끌어안고 떠나갈 듯 울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남편 되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
"설마."
"그래요. 지금, 이 아이에게 클로토의 이름을 주고 클로토로 키우자.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던 겁니다. 게다가 클로토의 메인 칩을 아이에게 심으면 그도 클로토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아내도, 결국 메인 칩에 개인적인 의지를 억제하고 자신을 로봇이라 인식하게 하는 기능을 추가시키더군요. 그 애는 자기가 로봇이고 클로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클로토가 아닐까요?"
"…."
"자, 그러니 이제 저희의 클로토를 돌려주시겠어요? 부탁드립니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기나긴 말을 겨우 끝맺은 남자가 여전히 기묘하게 웃는 얼굴로 묻는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으나 이내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는 말했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돌아가세요. 경고입니다."
패드를 통해 전해지는 음성. 그 음성은 너무나 잘 아는 이의 것인데도, 진실은 너무나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건너에서 들려오는 그 모든 언어가 심장에 칼처럼 박혔다. 눈물이 났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데 그게 소화기관 아니라 그것보다 더 깊은 곳,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진짜 로봇도 그렇다고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닌 자신이 싫었다. 괴로웠다. 진짜 나, 사랑받을 수 있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지석의 방을 기어가듯이 방문 고리를 잡았는데, 문밖으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 문밖의 누가 나를 사랑할까. 몸을 둥글게 만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훌쩍훌쩍 울었다.
그때 문이 먼저 열렸다. 거기에 지석이 서 있었다.
지석은 말없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자신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차마 몸을 기대지 못하자 그가 먼저 조심히 등을 도닥였다. 다정한 손길에 그제야 울음에 소리가 섞였다. 엉엉 소리 내 우는 게 익숙하지 않아 우는데도 숨이 찼다. 한참을 그 작은 품에 안겨있었다. 그게 이상할 정도로 위안이 되었다. 울음이 그쳐갈 즈음에야 지석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들이 당신을 안드로이드로 키웠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인간이라고 믿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빛이라고는 형광등 조명뿐인 지하방에서도 반짝거린다. 그 말이 너무 결연하게 들려서 꼭 일종의 고백처럼 들린다. 외로움이 목을 죄니 혼자 하는 착각에도 목구멍이 간질거린다. 대답을 바라는 말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 당신한테서 사랑받고 싶어요."
목소리가 말이 아니라 숨처럼 뱉어진다. 바보 같은 문장이다. 분명 후회할 말이었는데 말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덜컥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할게요."
"…. 네?"
"내가, 김정수씨를… 사랑, 해보겠다고요."
목소리가 떨려서 단어를 끊어 뱉으면서도 그 말이 꼭 아무것도 아니고, 당연한 일이라는 양. 곽지석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손으로 눈물범벅인 제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닦아낸다. 어안이 벙벙해져 더 이상 눈물도 새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면 어느새 귓가가 붉어져 있다.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시선을 피해 말을 돌리기도 전에, 그가 먼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살아요. 우리 제대로 살아봐요."
산다는 건 뭘까. 살아있다는 건 뭘까. 아무리 고민해도 그런 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지석이는 과거에 사로잡혀 자라지 않았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럼, 그동안 우리의 시간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 아쉬운 나날들은 누구의 손에서 사라졌을까. 아무래도 좋다. 아무도 보상해 주지 않는 지나간 일을 아쉬워하느니 이제부터 열심히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다. 나도 지석이도 앞으로의 날들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월까지 고작 다섯 손가락만큼이 남은 시점이었다.
"지석아, 네가 날 인간으로 만들어줘."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면 그가 벙찐 얼굴이 된다. 너는 이미 인간이잖아? 그렇게 묻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 일을 해줄 수 있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너뿐이다. 오로지 네가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인간이 되는 데에 필요한 준비물은 의료용 메스와 마취약, 핀셋, 소독약, 거즈, 그리고…
아무튼 살을 도려내고 다시 봉합하는 데 필요한 도구 전부.
지석의 지시가 없어도 맨 등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고 간이 매트리스 위에 엎드려 누웠다. 이제는 먼지도 없고 춥지도 않은 지하 창고는 온전히 집이나 다름없다. 국소 부위에 사용하는 마취제를 등에 주사하려는 지석의 손이 평소와 다르게 덜덜 떨렸다. 그가 완전히 울상인 표정으로 제게 말을 걸었다. 자신보다 그가 더 긴장한 모양새였다.
"정수, 이거 아프면 어떡해?"
"이렇게 사는 것보단 낫잖아."
그건 그렇긴 하다는 듯이 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둘 다 어느새 놓아버린 말이 이젠 자연스럽게 튀어 나간다. 기어코 마음을 먹은 지석이 마취 주사를 등에 따끔하게 꽂는다. 곧 메스를 집어 드는 달그락 대는 소리가 들린다. 볼 수 없는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다. 금속 칩의 윤곽이 또렷한 부위, 그 옆의 흉터들 사이로 메스를 가져다 대는 그의 얼굴은 얼마나 긴장되어 있을까. 이미 가족이라는 이름의 타인이 수없이 째고 꿰맸을 자리를 이제는 정말 마지막으로 갈라내는 것이 지석이라는 점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다. 마취제가 들어갔다고 해도 아주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살갗이 아닌 더 깊은 곳을 금속이 갈라내며 닿을 때 하는 수 없이 작게 앓는 소리가 날 뻔했지만, 가능한 한 꾹 삼켰다. 고작 그런 것으로 지석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얇은 등가죽과 근육층 사이에 존재하는, 여태껏 나를 그 무엇도 아니게 만들었던 작은 칩. 그것이 사라지면 나는 바로 내가 될까? 아마 아닐 것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이 되어서 내가 내 이름을 나로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지석이 핀셋을 살 아래로 집어넣어 기어코 칩을 집어 빼낸다. 나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것은 이제 피 얼룩이 묻은 고철 조각일 뿐이다. 철제 트레이 위에 그 칩이 소리 내며 떨어진다. 쨍그랑. 둔탁한 소리에 찌푸린 미간으로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다가 중얼거린다.
"안녕, 잘 가."
내 인사를 듣고 지석도 그 메인 칩을 빤히 본다. 그가 메아리처럼 똑같이 따라 되뇌인다. 안녕, 잘 가. 어쩌면 그도 무언가와 작별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어딘가 완전히 비어버린, 그러나 동시에 개운해진 기분이 든다. 지석이 의료용 실로 등 위의 째진 살을 조심히 꿰맨다. 그의 서툰 손길은 이전보다 더 흉을 남길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이제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엇도 대신하지 않고, 대체되지도 않고 그냥 김정수로.
간단한 수술이지만 하루이틀 정도는 샤워를 피하라고 지석은 신신당부하듯이 말했다. 혹시나 봉합 부위가 덧날까 싶은 세심한 배려라는 걸 알아서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 들어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몰래 웃옷을 벗었다. 지석이 꿰매준 등을 확인하고 싶었다. 거울에 비춰본 등은 날갯죽지 근처로 여러 번 그어진 흉터 자국이 어지럽다. 그사이에 아직 덜 아문 붉은 금이 하나 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화장실 문을 열고 한 발짝만 나가면 있을 지석이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다.
왜 등에 쉽게 손이 닿지 않을까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지금처럼 화장실 거울에 아무렇게나 상처 난 등을 비춰보던 언젠가의 어린 날이었다. 물론 등의 모든 곳에 손이 닿는다 해도 꼼꼼히 상처 연고를 발랐을 리는 없다. 그때의 나는 안드로이드였고, 로봇에게 인간의 연고 따위가 의미 없다는 것쯤은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등에 손을 얹어보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정말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나를 기계라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살고 싶은 이 마음이 정말 기계의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업그레이드할 때가 아니라면 아무도 내 등에 손을 얹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거다.
그러나 지석은 나에게 고장 난 게 아니라 다친 거라고 말했다. 나의 오래된 흉터들이 나를 위한 게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배고플 땐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내 등에 손을 얹었다. 정말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러므로 나는.
나를 다시 살아 숨 쉬게 만든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야 왜 등에 손이 쉽게 닿지 않는지 알 것도 같다.
그렇게 일월은 완전히 끝을 향한다. 이제는 손가락을 하나만 접으면 이월이 오지만, 그게 두렵지 않았다. 죽게 되더라도 후회되지 않았고, 이제는 나로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석은 나의 등에 매일 저녁 상처 연고를 발라주었다. 함께 지하실에서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고, 요리를 만들고, 식사를 하면서 이월이 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모든 클로토가 종료된다는 그날이 오면, 클로토의 강제 수거 명령은 자동으로 사라질 테니, 그때에는 함께 거리를 걸어 멀리 여행을 다녀오자는 약속을 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멀고 꿈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이 금방 깨어질 것 같다가도 아주 영원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상한 하루하루들이었다.
일월 삼십일일, 지석이 밖에서 케이크를 사 왔다. 기념일에는 케이크에다 초를 부는 거야. 지석이 그렇게 말했다. 딸기가 잔뜩 들어간 생크림 케이크였다. 이게 무슨 기념일인지를 물으려다가 말았다. 지석과 함께하는 모든 날이 기념일 같았다. 나는 생일을 처음 맞이하는 어린애처럼 어쩔 줄 모르고 웃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을 기다려 초시계를 패드 화면에 커다랗게 띄웠다. 케이크 위에 제일 긴 초를 하나 꽂고는 일월의 마지막 날을 카운트다운 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내가 초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어디에선가 들은 말이었다.
"초를 불면 소원 빌어야 한다던데"
"빌고 싶은 소원 있어?"
지석은 장난스럽게 물었으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인간이 되고 첫 소원으로 마땅한 것을 빌고 싶었다. 미간이 한참 좁아지다가, 번뜩 생각난 문장을 내뱉었다.
"지석이랑 오래오래 살게 해주세요."
지석과 눈이 마주친다. 마주친 시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소리 없이 웃는다. 그러다가 웃음이 터진다. 소리 내 깔깔 웃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순간과 영원이라는 정반대의 단어를 함께 쓰고 싶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마음이 영원을 만들어냈고, 그렇기에 우리는 지켜지지 않을지언정 진심을 다해 약속한다. 패드의 시계가 자정까지 삼십 초 남았다는 알람을 띄운다. 지석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성냥을 켜 초에 불을 붙인다. 함께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빈다. 삼. 이. 일. 줄어드는 숫자에 내가 숨을 후 분다. 한 번의 호흡에 초가 맥없이 꺼진다. 어둠이 좀 더 진하게 내려앉고, 패드의 시계 불빛만이 이월이 되었음을 알린다. 지석이 몸을 기울여 나의 어깨에 기대온다.
"정수, 내일에 온 걸 축하해."
"응."
어떤 내일은 이토록 어렵게, 그러나 특별하게 온다.
나를 사랑할 리 없다고 믿었던, 누군가를 사랑할 리 없다고 믿었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새로운 내일이다.
물론, 내일이 된다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하지는 않는다. 내일에는 내일의 할 일이 남아있다.
C-000626의 정보가 담긴 메인 칩을 직접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칩을 찾아내 위에 묻어 굳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버려버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 투명한 밀봉 봉투에 넣고 입구를 닫았다. 겨우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금속 칩을 주머니 속에 소중히 챙겨넣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나섰다. 걱정하며 따라오려는 지석을 괜찮다고 만류했다. 때로는 혼자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도 있다.
지상에서는 물 냄새가 났다. 거리 곳곳에는 덜 녹은 눈이 남아있긴 했으나, 제법 풀린 날씨 덕에 바닥은 축축이 젖어있었다. 얼마 만에 마주하는 햇볕인지 너무 눈이 부셔 제대로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겨우 적응하고 서야 길을 걸었다. 목적지도, 해야 하는 일도 너무나 확실했다. 어딘가 붕붕 뜨는 마음에 걸음이 자꾸만 빨라졌다.
우체국에 들어섰을 땐 숨이 찼다. 눈에 바로 보이는 작지만 튼튼해 보이는 연갈색 봉투 하나를 샀다. 그 안에 가지고 온 물건을 집어넣고 겉봉투에 집 주소를 적었다. 수신자에는 부모님의 이름을 적고, 발신자에 김정수라는 이름 세글자를 적었다. 벌써 과거의 망령처럼 느껴지는 클로토를 완전히 보낼 준비가 드디어 끝났다. 직원에게 봉투를 건네려다가, 그 위에 한 문장을 더 휘갈겨 써 내린다. 직원은 우편의 전산 등록을 마친 뒤 가셔도 좋다는 말을 남긴다. 속이 허하고 시원하다. 직원이 발송함으로 넣는 봉투를 한 번 더 흘끔 바라본다.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월, 클로토의 작동은 중지되었습니다.